톨레도 여행의 마지막 코스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산토 토메 성당도 톨레도 대성당처럼 무어인들이 만든 메스키타였다. 1085년 무어인들에게서 톨레도를 재탈환한 후 14세기에 지금과 같은 성당으로 바꾸었다. 이슬람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탑인 미나렛은 그 형태를 유지하며 성당의 종탑으로 사용했는데, 문화를 보존하면서도 스페인의 승전을 기념하려는 의도이다. 산토 토메 성당은 톨레도 대성당에 비하면 규모가 매우 작은 성당이지만, 세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한 점의 그림 때문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전면에 거대한 그림이 보이는데, 바로 세계 3대 성화 중 하나인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다. 오르가스 백작, 그러니까 곤잘로 루이스는 톨레도 지역 ‘오르가스’의 영주였다. 그는 매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해진 날에 음식을 나눠주는 등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베풀었고 신앙심도 깊은 사람이었다. 1323년 곤잘로 루이스가 죽자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안고 그 장례식에 모였는데,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림 한가운데 검은색 갑옷을 입고 누운 남자가 곤잘로 루이스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은 초대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로 알려진 스데반 집사이고,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성 어거스틴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백론』을 비롯해 수많은 저서를 남기며 교회의 교리를 정리한 인물이다. 스데반 집사는 옷에 유대인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또, 성 어거스틴은 목에 두른 스톨에 야고보 사도, 바울, 카타리나 성녀가 차례로 그려져 있다. 워낙 어질고 신실했던 곤잘로 루이스의 죽음에 얽힌 전설이란 바로 그의 장례식에 스데반 집사와 성 어거스틴이 나타나 그를 땅에 묻어줬다는 목격담이었다. 엘 그레코는 이 전설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실제론 반종교개혁의 방향성을 제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림은 상단과 하단으로 나뉘어져 있고, 지상의 모습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상단의 천상 부분은 왠지 모르게 표현하기 힘든 어색함이 묻어난다. 바로 매너리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엘 그레코의 그림에 열광했던 이유는 플랑드르의 사실적인 신의 모습보다 엘 그레코가 그린 인자하고 자비로운 신의 모습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구름 부분엔 우선 천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중상단 왼편의 세 사람, 하프를 연주하는 다윗, 지팡이를 든 모세, 그리고 배를 품에 안은 노아가 보인다. 이처럼 기독교 회화의 등장인물들은 그가 지닌 옷과 물건, 그리고 색상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 있어 기억을 해 두면 감상에 도움이 된다.
성모 마리아 뒤편에 있는 두 사람 중 노란색 옷을 입고 열쇠 2개를 가진 사람이 바로 베드로이다. 노란색에는 ‘회개’를 상징하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열쇠는 하늘의 열쇠와 땅의 열쇠를 상징하고, 종교화 속 베드로는 반드시 이 2개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맞은편, 벌거벗고 아랫부분만 가죽옷으로 가린 남자는 세례 요한이다. 그의 뒤쪽으로 나사로와 마리아, 그리고 마르다 삼남매가 보인다. 그 위 구름에는 예수의 열 두 제자가 모여 있는데, 그 중 유달리 채색이 강한 사람들을 눈여겨보면 펠리페 2세와 국왕과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보인다. 이들은 엘 그레코가 그림을 그리던 당시에도 권력을 쥐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엘 그레코는 그들을 천상의 인물들 중 하나로 그려 놓았다. 경의나 아첨일까?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그보단 종교적, 정치적인 의도가 더 크다고 여겨진다.
이제 그림의 하단, 지상을 살펴보자.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제일 오른쪽 아래 화려한 제의를 입고 책을 읽는 인물인데, 바로 산토 토메 성당의 주교였던 안드레아 누에즈 신부이다. 곤잘로 루이스의 유언은 오르가스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산토 토메 성당에 정기적인 후원을 멈추지 말라고 한 것이었다. 이 유연은 240년간 잘 지켜졌지만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이 후원을 하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드레아 누에즈 신부는 소송을 걸었고 1569년 재판에서 이기게 된다. 이때 안드레아 누에즈 신부는 곤잘로 루이스의 위대함을 되새겨 사람들이 왜 계속 후원을 해야 하는지 각인시키기 위해 엘 그레코에게 이 그림을 의뢰했다. 즉, 엘 그레코는 의뢰인을 그려 넣은 것이다.
왼쪽으로는 특유의 갈색 사제복을 입은 성 프란시스코회 소속 수도사, 그 옆으로 어거스틴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들이 보인다. 그리고 우리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남자가 있는데, 그가 이 그림을 그린 엘 그레코 본인이다.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에 몇 가지 특징을 남긴다. 첫 번째는 사인, 두 번째는 장소와 맞지 않는 배경, 세 번째는 하단부에 남기는 메모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인물들과 전혀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 그러나 엘 그레코는 스스로 등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흥미로운 시도를 가하는데, 그건 뒤에서 다시 소개하려 한다.
그 외에 『돈 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라 추측되는 인물, 대학교수 알론소, 피사의 프란치스코가 보인다.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이 그림엔 당시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왜 엘 그레코는 곤잘로 루이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그리지 않고 그의 사후 260년이 지난 ‘현재’의 인물들을 그려 넣었을까?
이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종교계의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517년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시작된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대항으로써 가톨릭에선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린다. 이때 공의회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입장을 세우며 ‘반종교개혁’ 운동을 진행한다. 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자청했던 카를로스 5세와 필리페 2세의 영향력이 강했던 스페인은 이 반종교개혁의 최선봉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엘 그레코 역시 이들과 일치된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 속에 성인과 세속의 인물을 함께 등장시켜 영적 세계와 실제 세계를 구분 지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가운데 누워있는 곤잘로 루이스의 심장 부분을 자세히 보면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비쳐 있다. 또, 스데반 바로 앞에 서 있는 소년은 엘 그레코의 아들인 호르헤 마누엘이다. 배치를 보면 알겠지만, 그림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종교화의 주제와 거의 관련 없는 아들에게 준 파격적인 시도이다. 소년은 손가락으로 곤잘로 루이스의 심장을 가리킨다. 두 성인과 성모 마리아 역시 그의 심장을 바라보고 있다. 스데반의 순교처럼 곤잘로 루이스의 삶이 바로 이런 희생이 바탕이었다는 걸 보는 이에게 강력히 환기시키려는 것이다.
엘 그레코의 그림에 펠리페 2세도 화답했다. 그는 엘 그레코의 화풍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그림이 반종교개혁의 의지와 가톨릭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260년 전에 죽은 곤잘로 루이스에게 ‘백작’, 스페인어로 ‘꼰데’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래서 그림의 제목도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된 것이다.
여담으로 이 ‘꼰데’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바로 ‘꼰대’다. 스페인에선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왕이 특별히 부여하는 영예로운 칭호인데, 우리나라에선 비하의 뉘앙스를 지니게 되었으니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동안 소개한 장소들 외에도 톨레도에는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엄청 많다. 그만큼 중세 시대의 모든 면이 살아있는 도시이다. 과거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사는 톨레도를 거닐다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과거 유럽은 ‘아프리카의 끝이자 유럽의 시작은 피레네 산맥’이라며 스페인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모든 지역 하나하나가 스페인을 대표할 정도로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어 냈다. 톨레도는 그런 스페인의 특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도시일 것이다.
글 하이로
스페인에서 12년째 거주 중이며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여행 전문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다. 투어라이브(Tourlive) 오디오가이드: 스페인을 제작했고, 마이리얼트립에서 "프라도에서 웃어요" 투어를 진행한다. SNS에서 1분 산책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