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해 온 대답 같은 곳, 시칠리아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김영하 작가의 책 때문은 아니었다. 나에게도 시칠리아는 그야말로 ‘오래 준비해온 대답’ 같은 곳이었다. 2020년 가을, 시칠리아 여행을 취소했다. 하루 2~300명이던 코로나 확진자가 갑자기 4천 명까지 급증하면서 불가피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코로나로 여행을 취소한 사람들을 위로한답시고 “곧 오실 수 있으실 거예요.”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내가 아니었던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일 년에 한 번, 어쩌면 평생 한 번일 여행을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여행자들의 허탈한 마음을. 나는 이탈리아 현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고작 50유로짜리 비행기 표만 날리면 됐지만,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여행인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아쉬움이 안도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발 예정일이었던 10월 12일로부터 열흘 후, 엄마가 거짓말처럼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허탈했고,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시칠리아에 있었다면 엄마의 임종은커녕 발인도 지키지 못한 나를 자책하며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엄마의 부고를 전해들은 직후에는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는데, 다행히 인도적 차원의 격리면제자로 분류되어 한국에 입국, 격리 없이 엄마의 발인을 지켜볼 수 있었다.
며칠을 정신없이 보내는 동안 이탈리아의 하루 확진자 수가 1만 명에서 2만 명까지 치솟았다. 당신 딸을 조금이라도 안전한 고국 땅으로 빨리 오게 하려 했던 것일까. 엄마는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듯 아찔한 순간에 훌쩍 세상을 떠나렸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고 미안하고 안타깝고 고맙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 생각만 하다 떠났을 엄마를 위해서라 울다 지쳐 쓰러질 수도, 매 순간 의미 없이 흘려보내기만 할 수도 없었다. 응당 나는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 했다. 단 한 번도 자랑스러운 적 없는 딸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행복해야 엄마가 편안히 눈 감을 수 있을 테니까. 내 행복이 엄마에게 가닿기를……. 나는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매일 더 행복해지자고 다짐한다.
그렇게 몇 달을 한국에서 보내다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현지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으나 내가 해야 할 몇 가지 일들만큼은 선명했다. 내가 벅차게 행복해질 수 있는 일, 다시 시칠리아에 가기로 계획한 것이다. 시칠리아는 간절히 붙잡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정확히 1년 후 같은 날, 다시 시칠리아로. 그것도 더 오랜 일정으로. 이건 아마도 지독한 미련일 것이다.
시칠리아가 내내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었던 것은 4년 전 혼자 떠났던 시칠리아를 향한 짙은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시칠리아에서 마음껏 웃었고, 행복해서 발을 동동 굴렀으며,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들을 만났다. 찬란한 체팔루의 바다에서 가슴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고, 아시아인인 내가 신기해 시선이 마주치면 부끄러워 딴청을 부리는 귀여운 사람도 보았다. 매일 지나가는 길에 커피 한 잔씩을 공짜로 내어주던 친절한바(Bar) 주인은 또 어떻고……. 나는 내가 가장 행복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여행에는 늘 타이밍이 있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다. 2년 가까이 백수 생활을 이어온 우리는 전자에 해당하였으나 당장 내일이 없을 사람들처럼 잔돈까지 끌어 모았다. 어림잡아 30일, 딱 한 달이면 바닥이 보일 것 같았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돌아오자는 무계획 같은 계획을 세우고 호기롭게 편도 티켓을 예매했다. 오래 준비해왔던 그곳으로 간다. 눈을 감고 마치 엄마와 함께 떠나는 듯한 상상에 빠져든다. 매 순간 온 감각을 동원해 그곳을 걸으리라 다짐한다.
2021년 10월 12일,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열흘 후, 보란 듯이 더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고 맛있는 음식을 배가 터져라 먹었다. 엄마를 위한 조촐한 제사상을 차리다가 고개를 들어 매정하게 한 번도 꿈에 나타나 주지 않는 엄마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엄마의 첫 번째 기일을… 그렇게 시칠리아에서 보냈다.
글/사진 김혜지(이태리부부)
파리, 로마를 거쳐 현재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기록하고 콘텐츠를 생산해 내며 삶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유투브 채널 '이태리부부' 운영 중. 『로마로 가는 길』, 『이탈리아에 살고 있습니다』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