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구하고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
몇 년 사이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을 대하는, 이상하리만치 분노에 치우친 반응들. 시대의 흐름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당연히 화를 내야 하는 일이라고 납득하기에는 심각해 보인다. (나만 불편해?)
분노, 혐오, 갈등 같은 키워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읽게 된 책 <분노사회>
내 생각을 크게 바꾸게 해 준 책이라기보다는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이나 가지고 있던 삶의 방향성을 다시 한 번 지지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분노는 과거 생존과 본능 같은 원초적 차원에서 작동했으나 물리적 폭력 등 신체 파괴의 위협이 줄어들면서 분노는 '정신적 차원'으로 이동했다. 윤리, 원칙, 준칙, 당위, 약속, 기대와 같은 '관념'을 어겼을 때 우리는 분노한다.
<분노사회> 12p
이 말에 의하면 우리의 분노의 대상은 우리가 믿는 '관념'을 훼손하는 존재다. 그러나 개개인마다 믿는 관념은 다르다. 책의 저자는 관념의 두 가지 층위를 소개한다.
1) 사회 전체의 층위 : 객관적 층위. 사회 제도, 시스템, 구조 등에 관한 것
2) 개인적 층위 : 주관적 층위. 취미, 사랑, 우정, 인격, 정서, 자아 정체성, 삶의 의미 등 개인의 삶
부당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분노하는 것과 내 삶의 불만에서 나오는 분노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만성화된 분노는 '내 삶'과 더 밀접하게 관계맺고 있다.
<분노사회> 18~19p
많은 이들이 심심치 않게 삶에서 나오는 불만, 갈등, 분노를 사회 탓으로 돌리는 데 익숙하다. 그럴 때 사회는 주로 정부, 국가, 정치인 등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사실 많은 분노는 내 삶에 사랑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 내가 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건전한 열의와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온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주관적 분노와 사회에 대한 객관적 분노를 혼동할 때, 사회에는 해결 불가능한 증오가 넘쳐나게 된다
<분노사회> 19p
저자는 위와 같이 현대의 '분노사회'의 원인을 분석한다.
현대 이전까지 사회적 존재였던 개인이 현대 사회에 이르면서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즉, 신분, 가문, 직업, 국가, 민족 등 사회적 요소에 의해 정체성을 갖추던 개인이 현대에 와서는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기준을 바탕으로 한 정체성 형성에 실패한 사람들은 결국 집단(정치, 종교, 성[gender], 지역 등)에서 정체성을 찾는다. 맹목적으로 집단에 정체성을 맡기게 되고, 증오의 대상을 지목하고 자기와 맞는 의견만을 찾아다니며 증오를 강화한다. 이런 비이성적 증오는 정당한 분노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정체성은 일반적으로 타자와의 구분을 통해 생겨난다. 집단 정체성의 경우에는 더욱 타자와의 구별을 중시한다. 나를 특정 집단 정체성에 동일시할 때, 그 집단은 어떤 식으로든 타 집단과 구별되어야 하고, 나아가 우월해야 한다. 내면에서 자기 정체성보다 집단 정체성의 비중이 높은 사람일수록, 그에 더해 자기 정체성의 자리마저 집단 정체성에 내준 사람이라면, 더 그러한 우월성을 필요로 한다.
<분노사회> 54p
집단에 자기 정체성을 맡긴 사람들은 우월하고 싶기 때문에 자기 집단을 합리화하는 맹목성을 갖고 있으며, 개인적 혹은 사회적 문제의 책임을 돌릴 적을 찾게 된다.
책의 저자는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기 삶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합리적인 개인 없이 합리적인 사회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자기 정체성의 확립 없이 올바른 사회 정체성의 확립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흔히 집단성과 보편성을 하나로 묶고, 개인성과 이기심을 하나로 묶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집단성과 이기심이, 개인성과 보편성이 훨씬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분노사회> 68p
집단과 함께일 때 더 쉽게 도덕성을 포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개인은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작가는 집단 구타, 왕따 등 집단의 행위 속에서 인간의 양심이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보편성'을 강조한다.
보편성 : 너와 내가 같은 '하나의 인간'에 속하며, 그 외 집단, 민족, 인족, 성별, 신분, 가문, 계층 등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범주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것. 이것이 '천부 인권' 혹은 '인간 존엄'의 전제.
우리가 온전히 개인일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이러한 보편적 관념이 언제나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나와 너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같은 인간이기 대문에 똑같이 존엄하다는 생각이 근간이 된다. 그러나 집단에 매몰된 사람에게는 다른 집단의 인간은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집단은 반드시 다른 집단과의 비교와 차이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주의의 문제는 개인들의 고립된 생활, 즉 소외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공동체 사회가 붕괴하고 개인이 파편화되어 혼자 외로이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파편화보다는 소통의 방식이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우리는 소통이 부족한 시대가 아니라 소통의 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넘쳐나는 소통들은 대부분 진정한 개인의 문제와 괴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과잉 소통과 연결은 개인이 개인이 되는 것을 방해한다. 즉, 개인의 소외는 개인주의의 횡횡이 아니라 '개인이 진짜 개인이 되지 못한' 데서 오는 현상이다.
<분노사회> 90, 92p
이렇게 진정한 개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문제를 직시하는 대신 결국 다시 집단에 자신을 던진다. 그 결과 개인주의는 퇴보했다. 집단적 열정으로부터 존재감을 얻고, 약자를 공격함으로 우월감과 희열을 느끼며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고 싶어 한다.
절망감과 상대 세력에 대한 증오는 집단에 투사한 자기가 부정당했기 때문에 생겨난다. 정의의 패배나 악의 승리라기보다는 자기가 광신했던 현실이 실현되지 않았음에 대한, 즉 자기 믿음의 배반, 부정당한 자기 자신에서 오는 절망이다.
<분노사회> 99-100p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짜' 개인주의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
개인을 강화시킨다는 것은 그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결시키는 것이고, 그에게 빚, 다시 말해 책임의 의미를 다시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를 보다 광대한 전체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다양한 그물, 다양한 충실성 속에 다시 들어가게 하는 것이고, 그를 자신에게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살짝 열어주는 것이다.
파스칼 브뤼크네르 <순진함의 유혹>
'나'라는 것, '개인'이라는 것은 오히려 이 세계 전체와 적극적으로 관계 맺을 때 더 진정하게 세워질 수 있다.
<분노사회> 135p
작가는 해답으로 '내가 사회와 맺고 있는 이 밀접한 관계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은 집단 안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찾으려 하지만 실제로는 집단적 역할 관계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이라는 것은 사라진다.
그렇다고 집단보다 중요한 개인 나르시스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만 특별하다는 고유성은 타자 혹은 타자로부터 영향 받은 자기 자신을 경멸하게 되기 때문이다.
혹은 자기 자신의 특별함을 찾기 위해 걱정 없던 과거, 행복한 시절에서 자신을 뽑아내 과장하기도 하지만 실제 우리의 정체성은 그렇게 확립되지 않는다고 작가는 강조한다. 인간은 계속해서 변화하며, 우리는 여러 순간들을 겪으며 그 안에서 계속 선택하고, 그 선택한 결과가 모인 것이다.
결국은 사회와 연결된 나, 그리고 유동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체성의 확립이다. 이러한 나의 정체성을 확립했을 때 올바른 사회를 구축하게 된다.
개인의 정체석 확립을 이야기하는 책의 저자는 결국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부당한 사회가 부당한 개인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줬다 해도, 결국 그가 부당한 개인으로 '완성'되었다면, 그 잘못의 최종적인 책임은 그 개인에게서 물어야 한다.
<분노사회> 167p
즉, 우리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의 가치는 타인에 의해 존귀해지거나 하찮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최종적인 의미 부여는 자기 자신만이 하는 것이다. 그럴 때 타인의 인정이 없어도 크게 동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가장 잘 아는 자는 결국 실천할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언급하며 '앎과 실천'이 동반되는 삶을 언급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책임감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저자는 결국 사회의 개선은 '정의로운 개인들'을 통해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은 사회와 개인을 분리하여,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지 말라는 비판을 한다. 개인들로부터 책임의식을 벗겨내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에게 개인이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며, 사회에 대한 책임보다는 권리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개인들에게 의무와 책임을 말하기보다는 면죄부를 발급하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즉, 핑계댄다는 것)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책임 있는 개인'을 요청한다. 그 책임을 통해 우리는 고유하고 특별한 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화를 누릴 권리와 정치에 참여할 권리만을 알 뿐, 문화와 정치에 기여할 의무는 알지 못한다.
(중략)
개개인들의 합리성과 도덕성에 기초하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개인들의 성숙 없이 사회의 성숙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분노사회> 189-190p
이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들이 나, 당신, 우리와 상관 없는 일일까요?
나, 당신,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을까요?
현대 사회, 여러 사건,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분노라는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분노하는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생각하지도 못하며, 문제의식조차 없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너무 뻔한 이야기, 혹은 낯간지러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결국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분노, 냉소, 무관심 같은 감정을 이길 수 있는 건 결국은 사랑이 아닐까. 저자도 책에서 우리의 존재 의미를 알아주고, 내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나를 사랑해준다면 우리에게 분노와 증오는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말로 '사랑한다' 한다고 혹은 마음으로 '사랑해야지'라고 먹는다고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 개개인의 삶의 방향성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궁극적으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의 거창한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 그리고 우리가 맺게 되는 모든 관계 안에 한 줌의 온기와 사랑이 더해진다면 천천히 분노는 사그라들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실제 삶 속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쉽지 않다. 당장 나조차도 매일매일 수많은 분노에 휩싸인다. 하짐만 내가 지금 당장 완벽하게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 삶과 언행의 방향성을 사랑으로 잡은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더 쉬워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남이 나에게 화를 낼 때 함께 맞서 화를 내는 것은 차라리 쉽다. 다만 내가 열 번 화냈다면 한 번 참고 아홉 번만 분노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하는 것, 먼저 인사하는 것,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 조금 더 성실하게 일하는 것, 조금 더 나 자신을 위한 일에 정성을 들이는 것, 작은 간식이라도 함께 나누는 것 같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나의 선택에 의한 것, 자발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릴 것이고, 때로는 공허하고 굉장히 외로울 것이며, 화가 나거나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성숙한 개인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분노사회'가 우리들이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더러운 것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 빗자루를 들듯 문제를 먼저 인식한 사람 그리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럽지만 남이 청소 안 한다고 나도 안 해버리면 우리 모두 다같이 더러운 곳에서 살게 되니까. 남들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신경쓰지 말고(안 쓸 수는 없지만 꼭 돌려받고야 말겠다는 태도로 하지는 말자는 의미) 나 자신에게 떳떳하게 살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태도를 스스로 기쁨으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