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실패했지만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이별 자체는 너무나 아프고 괴로웠다. 그 상실감이 너무 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그 자리가 많은 것들로 채워졌다. 그 덕분에 나는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는 기회, 그렇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 영국 워킹홀리데이가 내 첫 번째 터닝 포인트라면 이별이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됐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새롭게 얻었다기 보다는 이미 나에게 주어진 것이었는데 내가 그 소중함을 잊고 있었거나 혹은 알아차리지 못했다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스무살이 된 이후 가족을 떠나 독립해서 자취를 시작했고, 가족들은 몇 달에 한 번 만나는 정도였다. 떨어져 있다고 해서 나는 시시콜콜 일상을 나누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전화도 1~2주에 한 번 할까말까 할 정도였다. 내 개인의 삶은 너무나 바쁘고 치열했다. 그러다 보니 가족에게도 잘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에게도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가족들과 남자친구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친구와 이별한 이후 본가에 더 자주 가서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고, 평소에도 연락을 자주 하게 됐으며(주에 3~4번 씩 통화), 동생에게도 안부를 자주 물으며 관심을 더 많이 보내게 됐다.
퉁명스럽고 살갑지 못한 우리 가족들이지만 내심 좋아하는 것 같다. 엄마는 '힘들지? 괜찮아?'라는 따뜻한 말보다는 "그래도 이렇게 자주 볼 수 있어서 좋네"라는 위로인 듯 아닌듯한 말로 나에게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음을 일깨워 줬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직후 울면서 여기저기 전화했다. 갈 곳을 잃은 황망한 마음, 솟구치는 괴로움을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마구 폭주했다.
내 전화를 받자마자 아가에게 밥 먹이다 말고 남편에게 맡겨두고 한 시간 넘는 거리를 한 걸음에 달려와 준 친구, 자기는 위로를 잘 하지 못해서 같이 있어주는 것밖에 못한다는 말과 함께 그냥 내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줬고, 내가 혼자 있지 않도록 해줬다.
두 아들을 재우자마자 한 밤에 빗속을 뚫고 차끌고 와서 내 이야기를 들어준 언니, 회사에서 껍데기만 앉아 있는 시들시들한 나를 집으로 불러 라면(입맛이 없는 줄 알았는데 라면은 너무나 맛있더라...)을 끓여주며 끼니를 챙겨준 회사 친구,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는 나를 그저 꼭 안아주고 토닥인 회사 동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며 집으로 불러 따뜻한 집밥을 차려준 친구, 이 외에도 나와 함께 울어준 수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혼자 남겨진 것 같았고, 한심하고 별로인 존재라서 헤어짐을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주변의 많은 좋은 사람들 덕분에 '나 사랑받는구나, 나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 사랑과 응원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이별 후유증을 극복하고 잘 지내고 있다.
이 소중한 사람들은 나와 그를 잘 알고, 우리의 7년의 연애 히스토리를 기억하고, 함께 만나기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커플을 좋아해주고 축복해줬던 사람들이기에 일방적으로 그를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상실의 슬픔을 위로했고, 나와 그의 마음을 걱정했으며, 우리의 이별 자체를 함께 아파해줬다. 그래서 참 고마웠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간이 굉장히 많아졌다. 특히나 주말에. 코로나 때문에 어디 놀러가지도 못하고, 지인들도 만나지 못하게 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차고 넘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연애 뿐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객관적인 시선을 갖고 평가), 현재의 상태에 대해 사색하고, 앞으로의 삶을 고민했다. 심리 상담을 받기도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 애썼다.
미뤄뒀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더듬고 곱씹는 시간이 사실은 힘들었다. 내가 외면하고 싶던 내 모습을 발견하고 직면하는 건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나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면모, 좋은 모습을 많이 발견하기도 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새롭게 잡기도 했다.
그리고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아직 이직을 성공 하진 않았지만 처음으로 포트폴리오, 경력기술서를 만들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고, 에너지도 많이 들더라. 그동안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아 자괴감도 들고, 서류에서 탈락하니 자존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두 달 동안 작업했는데 아직도 포트폴리오와 경력기술서를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희미하게 흩어져 있던 나의 이력이 하나씩 구체화되기 시작하니 차근차근 완성해나가면 되겠다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 외에도 업무와 관련된 개인 공부를 하고, 책도 더 많이 읽고, 운동도 하면서 몸과 마음과 정신이 건강해질 수 있도록 단련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마음이 요동치고, 그가 보고 싶어서 감정이 휘청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을 깊이 차분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있다.
위의 내용은 나만 특별하게 발견하고 경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소중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이라면 내가 위에서 열거한 것들로 인해 텅빈 마음이 채워지는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이 외에도 각자의 다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평생 깨닫지 못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데,
소중한 것을 깨닫고 발견하는 기회가 생겼음에 감사한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