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한 가지를 깊이 연구하고 끝까지 파헤치는 과정을 통해 '세상사의 본질'에 눈뜨게 된다. 일단 세상사의 본질을 이루는 진리를 알면, 어떤 일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이나모리 가즈오 <왜 일하는가> 중
4년 간의 육아 휴직에 마침표를 찍고 올해 <학교>로 복귀했다. 나는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꾸준히 달리고 또 그것을 글로 쓰면서 세상사의 본질에 조금이나마 눈을 뜨게 된 것 같다. 나는 이제 아주 작고 사소한 성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제 아무리 위대한 일도 평범하고 사소한 일이 축적된 결과라는 걸 안다. 한 가지를 꾸준히 깊게 하면 삶의 다양한 부분이 변한다는 걸 안다.
3월 2일에 아이들과 첫 만남을 잘하기 위해 2월 중순부터 출근했다. 나는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되었다. 동학년 선생님들과 연구실에 모여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들 명단이 담긴 봉투를 뽑았다. 남학생 16명, 여학생 13명. 1년 내 품에 쏙 안아 키울 아이들 29명의 이름이 명단에 적혀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쾌적하게 지낼 수 있도록 교실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책상마다 가림막을 붙였다. 학교와 학년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학급 교육과정 초안을 짰고, 학습 준비물을 신청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엔 '담임 소개서'를 썼다.
다른 준비는 차근차근 잘했는데 담임 소개서가 부담스러웠다. 내가 이 학교 근무가 처음이라 학부모들이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교육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관심이 많을 것이었다. 사실 쉬운 길이 있었다. 외장하드에 몇 년간 조금씩 업그레이드해서 썼던 담임 소개서가 있었다. 그걸 수정해서 보내도 괜찮았다. 하지만 올해는 빈 종이에 내 생각을 차분히 담고 싶었다. 휴직 전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으니까.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달리기를 즐기게 되었고,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며칠간 1년 간 아이들과 어떻게 살지 내 교육 철학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협동하는 꿈두레 13기 학부모님들께 드리는 편지>라고 제목을 쓰고, 나에 대한 소개, 협동하는 꿈두레의 뜻, 우리 반 학급 목표와 핵심 가치, 학부모님들께 부탁하고 싶은 말을 편지에 담았다. 마지막 퇴고를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으며 혼자 웃어버렸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 안에 달리면서 얻은 삶에 태도들이 가득 녹아있었다.
[학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중 일부]
우리 반 학급 목표는 '배움과 나눔으로 행복하게 성장하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핵심 가치로즐거움, 믿음, 성취, 협동, 꾸준함 이 다섯 가지를 추구하려고 합니다.
첫째, 배움이 '즐거운 경험'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디폴트인 시대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꾸준히 배우며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 배우는 것 자체를 좋아해야 합니다. 배움이 즐거운 경험이 되도록 아이들의 삶에서 겪는 문제를 배울 거리로 가져오고, 다양한 생각을 주고받으며 해결 방법을 찾고,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도록 수업을 구성할 생각입니다.
둘째, 아이들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돕겠습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삶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목적지는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에 대한 믿음이 단단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아효능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해낼 수 있는 수준의 과제를 제시하고, "너를 믿어.", "넌 할 수 있어.", "대단해.", "정말 잘했다."는 긍정의 말을 듬뿍 해 줄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겪으며 경험을 쌓아 마음이 더 단단해지도록 돕고 싶습니다.
셋째, 아이들이 '작은 성취'를 소중히 여기도록 하겠습니다.
-제 아무리 위대한 일도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결과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날마다 하는 크고 작은 성취를 소중히 여겼으면 합니다. 내가 해낸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꾸준히 성장하는 힘을 갖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부터 아이들의 작고 사소한 성취에 감동하는 선생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배움 공책을 적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주마다, 달마다 자신의 성장을 확인하는 시간 가질 생각입니다.
넷째, '협동하고 나누는 교실 문화'를 만들겠습니다.
3월 2일 첫날, 시험 대형으로 놓인 책상에 앉아 가림막 속에서 마스크를 쓰고 저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학교의 존재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코로나 시대 안전하게 학교 생활을 하는 것이 1순위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바로 협동, 나눔, 다양성입니다. 친구들과 토론하면서 배운 것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만나고 부딪히면서 생각이 여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안전 수칙을 지키면서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 돕고,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려고 합니다.
다섯째, 아이들과 함께 '꾸준히 성장'하겠습니다.
저는 <프레임>의 저자 최인철 교수가 천재에 대해 정의한 문장을 좋아합니다. 그는 '매일, 조금씩, 될 때까지 탁월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천재를 정의했습니다. 요즘은 학력, 이력, 경력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꾸준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기록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사람이 전문가로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꾸준히 성실하게 쌓아가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려고 합니다. 다양한 활동보다 하나의 활동을 꾸준히 깊게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 반 특색 활동으로 '나빛 글쓰기'를 계획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안내하겠습니다.
고백하자면 예전에는 열정 만수르 선생님이었다. 일단 아이들에게 많은 내용을 가르쳤다. 교과서 내용 외에 심화 자료를 더해 활동지에 담아 가르쳤고, 쉬는 시간을 넘겨서 수업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다양한 활동을 했다. 토론, 그림책 읽어주기, 온 책 읽기, 프로젝트 수업, 글똥누기, 학급 문집, 배움 공책, 주말 가족 숙제, 학급 온도계 등 교실에서 쉴틈없이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열정이 넘치다 보니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목표도 높았다. 잘하는 아이들이 활동 결과물의 기준이 되었고, 다른 아이들에게 '너도 노력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해내도록 도왔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내가 쏟는 열정을 100% 이상 흡수해 나날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에 내게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작용해 나는 더 열심히 수업을 준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명이 밝아도 빛이 미치지 않는 곳, 그늘지는 곳은 있다. 버겁고 힘들어했던 몇몇 아이들 얼굴이 떠오른다. 5Km 달리기도 힘든 아이에게 10Km 마라톤 완주를 하도록 이끈 샘이었다. 결국 해냈지만 그 과정이 지치고 힘겨웠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 아이 수준의 작은 성취에도 '이 정도로 대단하다.'며 손뼉 쳐주고 따뜻하게 안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고 눈물이 난다. 작은 것을 꾸준히 쌓아가게 했으면 그 과정에서 스스로 자부심과 성취감을 느꼈을텐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후 내 교육 철학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아이들이 많은 것을 배우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경험'이 되면 좋겠다. 내가 달리는 것이 즐거워서 매일 달리게 된 것처럼 즐거워야 꾸준히 공부할 마음과 용기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좋겠다. '나를 향한 믿음'이 단단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고, 한계 없이 계속 성장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사람으로 자라도록 나부터 아이들을 믿어주고, 아낌없이 응원을 보내주고 싶다. 아이들이 '아주 작은 성취'를 소중히 여기면 좋겠다.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이 쌓여 성장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이 날마다 작은 성취를 하며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꾸준히 성장'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꾸준히 공부하고 끈기 있게 헌신하면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꾸준함이라는 근육을 키워주고 싶다.
달리기와 닮은 나의 교육 철학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지는 아직 모른다. 일부러 정하지 않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나는 바탕이 될 도화지를 준비하고 큰 방향성을 세우는 사람이고, 거기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고유의 색을 입히는 건 우리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천히 아이들과 궁합을 맞춰가며 우리가 가진 에너지의 흐름에 맡겨보려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어가며 우리만의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 믿는다. 우리의 시작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마침표를 찍을지 너무나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