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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예지 Aug 16. 2022

37화_관계의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 준 달리기

고통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건강한 방법


"내일 아침에 짐 싸서 집에서 나가! 부모 자식 간 인연도 끊자."



하루아침에 어머님에 의해 내 집에서 쫓겨났다. 우리 부부는 1년 반 정도 기간 동안 아버님이 지은 빌라의 주인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파트 생활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죽어도 빌라 생활을 하기 싫다고 해서 우리 부부가 들어와서 살면서 전월세와 공사 마무리까지 초기 세팅을 마쳤다. 아버님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로 날마다 힘들어하는 어머님에게 우리 부부는 마음을 쓰고 정성을 쏟았다. 그런 우리에게 어머니는 이 집에서 나가라고 호통쳤다. 나는 뱃속에 6개월이 된 둘째를 품은 채 남편과 나란히 앉아 한 시간이 넘도록 어머니와 이모님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들었고, 내 집에서 쫓겨났다.  


결혼하고 6년 간 평범했고 때론 다정했던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쩌다 관계가 이렇게까지 된 걸까?





시작은 아버님의 미국행이었다. 아버님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공직 생활 중에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녔다. 처음엔 일본에 있는 대학원을 가려고 2년 간 새벽마다 일본어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지만, 미국이 아들의 영어 실력을 키워주고 다채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해서 미국을 택했다. 미국 생활을 하며 아버님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골프를 치고,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중학생 아들의 수학을 가르쳐주며 인생의 여유를 즐겼다.  그때부터 아버님은 은퇴 후에 미국에서 사업을 하며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퇴직 후에 미국에서 주유소와 마트를 경영하고 싶어 했고, 어머님과 함께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해 적절한 주유소 물건을 찾았다.



어머니는 미국에 가기 싫어했다. 어머니에게 미국은 꿈의 장소가 아니었다. 아버님은 대학원 새활을 하며 여유 있게 지냈지만, 어머니는 한국에 있는 친척들을 그리워하며 많은 날들 외로움을 느꼈다. 아버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님은 아들이 미국에서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레스토랑과 초밥집 등에서 일을 하며 돈도 벌었다. 어머니는 "이 나이에 또 미국에 가서 낯선 장소, 마음 붙일 곳 없는 사람들 속에서 육체노동까지 하며 살고 싶지는 않아."라고 말했다. 아버님께 수차례 미국에 가기 싫다고 말했지만 이미 꿈을 향해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는 아버님께는 그 말이 계속 튕겨져 나왔다. 준비 과정부터 집안엔 분란이 생겼지만 어머님은 새로운 삶을 결정하고 추진하기를 좋아하는 아버님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었다.  



결국 3년에 걸친 고민과 갈등 끝에 어머니가 동의했고 아버님과 어머님은 미국에 가서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비자가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아버님은 비자도 나오지 않았는데 주거용으로 가지고 있던 아파트를 시세보다 3000만 원이나 저렴하게 팔아버리셨고, 현재 거주 중인 전세도 내놓았다. 어머니는 아직 비자도 나오지 않았는데, 상의도 없이 어머니 명의의 아파트를 팔아버렸다며 분노했다. 또 비자가 나오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월세집에서도 나와 원룸에 임시 거쳐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어머니는 날로 초췌해졌고, 격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우리 앞에서 아버님께 언성을 높이거나 흐느껴 우시곤 했다.



출국을 한 달 앞두고 드디어 비자가 나왔다. 아버님은 미국 이주 준비를 위해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셨지만, 어머님은 많이 우울해했고 때론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어머님은 미국 이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버님께 섭섭한 마음이 극도로 치달았다. 30년 넘게 함께 살면서 아버님이 어머니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했던 수많은 인생의 중요 결정을 떠올리며 억울해하고 힘겨워했다. 어머님이 너무 안쓰러웠다. 많은 날들 이야기를 들어드렸고, 위로해드렸지만 나의 노력을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어머님은 평생 아버님만 바라봤는데, 아버님은 어머님이 정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다정하게 배려하고 다독여주지 않았다. 어머님은 아버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극에 달했고, 부부 사이의 틈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그렇게 싫으면 당신은 미국 오지 마! 나만 갈 테니까."  


출국을 일주일 앞둔 늦은 밤. 계속해서 불안해하고 신경질을 내는 어머님을 향해 아버님이 고함치며 말했다. 아버님은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러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어머니는 당당하게 혼자 한국에 살기로 결정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머님은 남겨졌다. 아니, 이렇게 이렇게 생각했다. "난 버려졌어. 평생 남편만 바라봤는데,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나부터 버렸어."라고. 아버님은 떠나기 이틀 전 나를 찾아왔다. 그리곤 "우울증으로 보여. 이모한테 병원에 데려가 보라고 말했어. 일단 너는 알고만 있어."라고 하셨다. 아버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우울함을 견디지 못해 바닥까지 내려간 상태라는 걸. 하지만 떠났다. 나 또한 아버님이 너무 야속했다. 어머니를 잘 보살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가 마음 붙일 곳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며느리 손주 그리고 가까이 사는 바로 위 언니 '이태원 이모'님 이렇게 두 군데였다. 아버님이 떠날 당시 나는 2개월이 된 시호를 키우고 있었는데, 시호가 4개월 정도 되었을 때부터 어머니는 일주일에 두 번 우리 집에 와서 네 시간 시호를 봐줬다. 그럼 나는 그 시간 동안 요가를 배우고, 장을 보고,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조금은 쉴 수 있어 너무 감사했다. 처음엔 일주일에 두 번이었지만 세 번이 되기도 했고, 잠을 자고 가는 날도 생겼다. 어머니는 살림과 육아에 취미가 없어서 내가 직접 요리해서 어머니 밥을 차려드렸고, 간단하게 음식을 사 와 같이 먹기도 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같이 있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님 이야기를 나에게 많이 했다. 아버님과 살면서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했던 일들을 나에게 들려줬다. 어머니에겐 단 하나의 '결정권'도 없었다. 어머니는 늘 아버님의 사랑을 갈구했다. "예뻐요."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 했고, 아버님이 있으면 늘 그 곁에 달라붙어 있고 싶어 했다. 결혼 초엔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나이 들면 아버님 어머님같이 변함없는 끈끈한 애정이 있는 부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애정 갈구고,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너무 쏠린 건강하지 않은 관계라는 걸. 어머니가 마음에 쌓인 감정을 토해내실 수 있게 정말 많이 들어드렸다. 공감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함께 분노하기도 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모든 걸 아버님께 맞추며 산 어머니의 삶이 너무 안타까웠다.



우울하고 속상한 이야기들은 내 정신을 갉아먹었다. 많은 날들을 어머니를 위해 시간을 쓰고, 마음을 다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어머니는 급기야 전셋집에서 나와 다른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 집 빌라 지하 1층을 쓰시겠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고집을 부리시니 어쩔 수 없었다.  "나 작은 방에서 살게." 그 후 말을 바꿔서 어머니는 일방적으로 우리 부부에게 우리 집에서 살겠다고 통보했다. 다른 집엔 마음을 붙이고 싶지 않다며. 정 불편하면 너희가 나가라고. 그 순간 거절했어야 했는데, 혼자 우울해하실 어머니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해야 할 도리라고 각오도 하고 있었다.



힘께 살수록 내 시간과 공간을 어머니와 공유해야 하는 게 답답했다. 내가 육아 휴직 중이라 24시간 집에서 생활하는데, 어머니도 일을 하지 않으니 계속 집에 머물렀다. 첫째도 어리고 둘째도 뱃속에 있는데 우울해하는 시어머니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밥을 차리고 집안일을 해야 했고, 남편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어머니 앞이라 꾹꾹 눌러 참야 했다. 나는 스트레스가 쌓여 예민해졌고, 우울한 기운이 집안 공기를 가득 채웠다. 신혼 초에는 어머니가 웃음 많고 생기발랄한 편이셔서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니 자꾸 대화가 미끄러졌다. 어머니는 자신을 헌신해 누군가를 배려하고 칭찬해주고 온 마음을 쏟는 성격인데, 나는 관계도 중요하지만 나에 대한 사랑이 깊고, 타인보다 내 성장에 집중했기 때문에 같은 문제를 봐도 해결 방법이 달랐다.   



결정적으로 어머니와 사이가 깨어져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 부부가 투자를 목적으로 집을 샀는데, 그 일을 자신과 상의하지 않았다며 극도로 서운해했다. 아마도 어머니는 자신을 또 버리고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것 같아 두려웠던 것 같다. 우리는 투자 목적으로 전세를 끼고 산 것이었는데. 그날 밤, 나와 남편 어머니 그리고 부동산 계약을 도와주러 서울에 올라온 우리 엄마까지 넷이 식탁에 앉은자리에서 어머니는 내가 그동안 자신에게 잘못하고 상처 준 모든 말들을 들춰내어 따지기 시작했다.  나는 수치스러웠고, 엄마에게 죄송했다. 두 어머니들 사이 언성이 높아졌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 다음날 아침, 나는 울먹이며 어머니께 그동안 진심을 다해 노력했지만 부족한 점도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받아들이는 듯했다.



나는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휴식을 하러 부산으로 피신하듯 내려갔다. 더 이상 어머니와 건강한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나를 붙잡고 울었다. 너무 속상하다며. 어린 아기를 키우며 임신까지 한 상태에서 마음이 아픈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살아야 하는 내 처지가 안쓰럽다며 울고 또 울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화로 잘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계속해서 남편을 통해 사과를 요구했다. 유약한 남편은 중간에서 중심을 잘 잡지 못하고, 나에게 어머니의 말을 고스란히 전하며 상처를 덧나게 했다.



나는 조각난 관계를 회복하긴 어렵지만 최소한 정리하고 하고 싶어서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께 잘못한 부분은 사과를 드려야 나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머니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서로 함께 살기를 바라서 내가 카톡으로 아버님께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을 읽고 어머니는 단단히 분노해있었다. 니 까짓게 뭔데 나를 평가하냐며 당장 나가라고. 어머니와 이모님은 뱃속에 6개월 된 둘째를 품고 있는 나에게 모욕적인 말과 칼로 베는 듯한 말을 쏟아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님이 다시 같이 살면서 아버님이 어머님을 진심으로 위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나의 노력은 잘못된 과녁을 향하고 있었고, 우리의 관계는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지내면서 어머니와 이모님에게 들은 폭언이 떠오를 때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름 정신적으로 단단하다고 나 스스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가까운 가족에게 너무나 날카로운 말을 들었기에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첫째 시호를 안은 채 울었다. 엄마에게 미안해서 티를 낼 수 없어서 혼자 있을 때 멍하니 앉아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나마 엄마와 아빠 곁에 있지 않았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생활할 수 없어 병원을 찾았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남편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도 못했다. 남편도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골이 깊은 갈등 해결에는 미숙했고, 어머니와 아버님 틈에서 우왕좌왕했다. 소나기를 피하도록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냥 함께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았다. 남편도 부모님들의 불화로 몸도 마음도 지쳐서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부산에서 머물며 서울에서 하남으로 이사를 준비했다. 우리 집이 있었지만 전세를 끼고 샀기 때문에 우리 집으로 들어가진 못했다. 새 아파트에서 월세로 살며 어머니와 분리된 공간에서 지내니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것 같았다. 이사하고 4개월째 둘째를 낳았다. 가벼운 스트레칭부터 유산소 운동을 거쳐 4개월째에 '체력' 하나 단단히 키우고 싶어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릴 때마다 어머니가 내게 쏟아냈던 모진 말들이 내 마음을 괴롭혔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웠다. '너는 다른 사람 마음에 공감을 못한다. 내 앞에서 내 아들에게 함부로 했다. 너 때문에 상처받았다. 너희 아버지랑 네가 다를 바가 없다. 아랫사람이 감히 먼저 사과를 하느냐. 평생 안 봐도 상관없다.' 등...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가까운 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졌다. 불현듯 떠오르는 어머니의 말과 표정, 그 순간의 모욕감이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끈떡 지게 내 몸에 들러붙어 나를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찾은 건 달리기였다. 어지러운 감정을 정리하고, 황량한 마음에 신선한 바람이 통하게 하는데 달리기 만큼 좋은 게 없었다. 날숨에 원망 한 덩어리와 속상한 마음을 토해내고, 들숨에 싱그러운 자연의 향기를 들이마시면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수많은 날들을 달리고 달리며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찾았다. 어디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건지. 내가 어머니 입장을 헤어리지 못한 점은 무엇인지 되짚었다. 어떻게 하면 어머니가 더 좋아질 수 있을지 어머니를 돕고 싶은 마음 또한 여전했다. 또 가끔은 어머니를 탓하기보단 내 부족한 점을 자꾸 끄집어내며 나를 더 상처 내 기도 했다. 그래도  달리기를 마칠 때쯤엔 조금은 널뛰던 감정이 잠잠해졌고, 이 또한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과정이라고 내 마음을 다독이면 그날 하루는 잘 살 수 있었다. 달리기 덕분에.



그때 정말 관계와 관련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어머니와 나는 적당한 심리적 거리가 무너져있던 상태라는 걸 알았다. 함께 있음으로써 오히려 서로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남편도 자식도 아닌 또 다른 사람과 함께 24시간을 공유한다는 건 엄청 어려운 일이었는데, 내가 너무 쉽게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처음부터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수많은 감정 노동과 생활 습관에 적응하며 나는 날마다 긴장 상태에서 살며 지쳐갔다. 어머니 또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가족들의 위로와 공감으로 해결될 수 있을 정도의 심리 상태가 아니었다. 너무 한 순간에 나쁜 감정을 치달아 따로 살게 되건 속상하지만, 그래서 최소한 더 고통받지 않고 각자를 지킬 수 있었다.   



'아, 어머니도 너무 힘드셨겠다. 이제 그만 원망을 내려놓자.' 1년이 지난 어느 날 같은 장소를 달리면서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툭'하고 놓을 수 있었다. 고통스러웠던 관계에서 진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용서했고, 다시 만나면 최소한 고개를 들어 인사는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마음이 힘들 때, 복잡한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어지러워 정리를 하고 싶은 때 나는 1순위로 달리기를 찾는다. 심장을 옥죄는 듯한 느낌을 버텨내며 끝까지 달리고 나면 내 몸도 마음도 단단해짐을 느낀다. 남편과 감정이 부딪혀 생각 정리가 필요할 때, 아이들이 아프지만 내 힘으로 당장 어찌할 수 없는 통제 불가능의 상황에 놓였을 때 애걸복걸 마음을 졸이기보다는 건강하게 움직이고 땀 흠뻑 흘린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오롯이 견뎌내고 버틴다. 숨조차 쉬기 어려운 고통의 순간에 달리기는 유일한 내 숨구멍이다!  




지난주 토요일 리 블로그 네트워킹 파티에 다녀왔다. 참여한 많은 분들이 블로그에 글을 쓰며 나를 또렷하게 만들고 내 이야기를 쓰면서 나를 돌보고 치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공감했고, 웃었고, 함께 울었다. 그 순간들을 함께 하며 나는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와의 관계를 잘 꾸리기 위해서' 도 달리기를 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지금 힘들어? 뭐가 힘들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괜찮아질 거야.'라고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시간,  글쓰기와는 다른 매력을 달리기가 그 시간을 선물해준다.  나와 타인, 나 스스로와의 관계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일상 달리기'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30분! 30분 달리기를 권하고 싶다.  




현재 어머니와 나는 3년째 여전히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남편이 2주에 한 번씩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어머니는 지인과 매일 아차산을 오르며 몸도 건강해지시고, 마음도 많이 밝아지셨다고 한다. 취미생활도 꾸준히 하시며 마음을 붙일 곳을 찾으셨다. 언젠가 어머니와 등산도 같이 하고, 함께 천천히 서울숲을 달리고 싶다. 힘들었던 시기 서로에게 상처 줬던 말들을 함께 흘리는 땀방울에 날려버리며 다정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며 웃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관계 때문에 힘든 분들, 마음 챙김이 필요한 분들께 달리기를 권하고 싶다. 건강하게 땀 흘리며 그저 묵묵히 길 위를 달리다 보면 고통에서 해방되는 순간, 한층 성숙해지는 지점을 만날 수 있다!



-달리기로 너와 나의 일상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사람 런예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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