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2일, 잠실 한강공원에서 열린 서울오픈 마라톤 하프 코스에 참가했다. 수많은 러너들과 길 위를 달리며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너무 설레고, 복직 후 체력이 많이 떨어졌기에 하프를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도 돼서 잠을 설쳤다. 21.095Km를 달리기 위해 아침을 든든히 먹고, 택시를 타고 잠실 한강공원 제4 주차장에 내렸다. 평소에는 한가로운 한강 산책로가 배 번호표를 가슴에 단 채 걷거나, 가볍게 뛰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와, 드디어 내가 마라톤에 참가하는구나.'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행렬에 자연스럽게 끼여서 마라톤 행사장으로 향했다. 공원 곳곳에 단체 티를 입은 마라톤 클럽 사람들이 보였다. 많게는 20여 명 정도에서 적게는 5-6명까지 단체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그중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김포 로열젤리 마라톤 클럽'. 로열젤리라는 이름부터 재밌었고, 빨간색 단체 티가 강렬하고 선명했다. 회원들의 나이는 50-70대 정도로 보였는데, 나이가 무색하게 눈빛은 형형했고, 몸은 단단하고 강인해 보였다. 그런 사람들 20명이 모여 내뿜는 에너지는 상상 이상이었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나도 언젠가는 나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과 함께 단체 티를 맞춰 입고,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라는 가슴 떨리는 상상을 했다.
"자, 곧 출발하겠습니다. 출발선 앞에 서주세요."
식전 행사가 끝나고 9시가 다 되자, 사회자의 외침에 따라 출발선을 기준으로 긴 행렬이 늘어섰다. 하프를 뛰는 사람들이 맨 처음에 섰고, 10Km 도전자가 중간, 5Km 도전하는 사람들이 뒤쪽에 섰다. 조금이라도 잘해보고 싶어서 나는 앞으로 살금살금 나아갔다. 커다란 스피커에서 '아! 대한민국' 노래가 흘러나왔다. 옛 노래라 올드하다는 생각은 찰나였고,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고 짜릿하던지. 제자리에서 뛰며 가볍게 몸을 푸는 사람들과 흥겨운 음악 소리 때문에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나는 행복합니다." 사회자의 외침에 따라 나도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드디어 출발! 들뜨고, 설렜지만 생애 두 번째 하프 도전이라 두렵기도 했다. '맞아. 나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야. 새로운 도전을 통해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선거야.'라고 속으로 외치며 용기를 냈다. 어림잡아 400명 정도는 됐던 것 같다. '서울 오픈 마라톤'이라고 쓰인 풍선 대문을 지나 수많은 러너들과 함께 쏟아지듯 달려 나와 한강 산채로를 점령했다.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모두가 러너들이었다. 달리는 데 평소보다 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고, 분명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도 믿기지 않을 만큼 에너지가 넘쳤다.
"1Km 기록은 5분 52초입니다." 런데이 코치가 외쳤다. 시작이 좋았다. 평소에 빨라도 6분 30초 전후로 달리는 나로서는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출발하고 5분 정도는 많은 러너들과 함께 한강을 곁에 두고 달리는 게 꿈만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대로 6분 초반대를 유지하면 좋겠다는 근거 없는 기대를 품었다. 두 다리를 힘차게 굴리며 앞질러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한 명, 두 명 내 앞에 덩치 좋은 러너들을 추월하며 자신감이 더욱 상승했다. 고수 러너들은 처음엔 천천히 가볍게 뛰다가 5Km를 지나면서 점점 속도를 높이는데, 나는 흥분감에 휩싸여 이성을 잃고 생각이 마비된 상태였다.
2Km 지점부터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2Km 기록은 6분 9초, 3Km는 6분 27초, 6Km에서는 7분 31초까지 떨어졌다. 속도가 느려질 걸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에 마음이 괜찮았지만, 문제는 다른 데에서 터졌다. 나는 분명 앞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리고 또 달리는데, 한 명, 두 명, 세 명... 잇따라 러너들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러너들에게 추월을 당했다. 나는 있는 힘껏 앞을 향해 나아가는데 계속해서 뒤쳐지기만 하는 상황.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보다 체격도 좋고, 달리기 경력도 많고, 이 중에서는 풀 마라톤까지 달려본 고수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렵고 못난 내 모습이 싫어서 눈물이 났다.
총 21.095Km 중 3분의 1일 8Km를 달렸는데, 벌써 몸이 축축 처지기 시작했다. 6월의 주말 오전 햇빛은 온몸을 태워버릴 것처럼 강렬하게 뜨거웠다.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그날이라 컨디션까지 좋지 않았다. 이제 겨우 8Km인데, 앞으로 남은 13Km를 어떻게 뛸지 걱정 한 덩이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반환점을 돌아 하프 도전자들이 벌써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나는 아직 반도 못 달렸는데...' 충격에 휩싸였고, 경이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분들이 웃고 있었다. '달리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나의 슬로건을 다시 한번 속으로 외치며 힘을 냈다.
그때였다.
"예지님, 파이팅이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어떻게 알아보셨지?' 힘든 와중에도 궁금증이 이는 찰나, "물속에 달입니다."라고 러너님이 대답해 주셨다. 바로 블로그 이웃 '물속에 달'님이었다. 마라톤 참가 전날 블로그에 댓글로 하프 코스 반환점이 바뀐 걸 알려주신 친절한 이웃 러너였다. 블로그에서 내 사진을 보고, 나를 알아보셨나 보다. 노란색 티에 반바지 차림,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달리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Km 정도는 물속에 달님의 노랑노랑 한 뒷모습을 보고 기운 내서 따라갔으나 9Km 정도에서 점점 멀어져서 완전히 이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나를 믿는 것', '나의 길을 가는 것'뿐이었다. 다시 힘을 냈다. '1Km씩 정복하는 것에 집중하자.'라며 속으로 외치면서 내 달리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초반에 페이스 설정과 멘털 관리에 실패한 탓에 힘든 순간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잠시라도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마음을 다잡아도 타들어갈 듯한 햇빛에 몸과 의지가 흐늘흐늘 녹아내렸다. 그럴 때는 오늘의 경험을 어떻게 글로 녹일까 생각했다. 앞에 가는 러너의 뒷 보습을 바라보며 함께 리듬을 맞춰 뛰기도 했다. 맞은편에서 오는 러너들의 갖가지 표정과 몸짓을 관찰하며 그들의 달리기 인생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반환점을 지나 15Km를 향해 달리는데 오르막을 만나 잠깐 숨을 고르며 걸었다. '함께 달리면 그저 좋을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걷는 사람을 보면 나도 따라 걷고 싶었고, 잘 뛰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내가 초라해 보이고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나름 체력을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노련함과 강인함으로 반짝이는 달림이들 사이에서 나는 하수 중에 하수였다. '차라리 혼자 달리는 게 낫겠다.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으니.' 강풍이 불어 날아갈 것 같았던 12월의 첫날 나 혼자 하프를 완주했던 게 대한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달렸기에 얻을 수 있었던 뜻밖의 위안도 있었다. 힘겨워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정말 누가 봐도 건장한 남성들도 지쳐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생각보다 정말 많은 러너들이 달리고 걷고를 반복했다. 심지어 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이 더 많은 구간도 있었다. (물론 잘 달리는 사람들은 쉬지 않고 결승선까지 달렸을 것이다.) 사람들은 중간중간 급수대에서 물로 수분을 보충하고 한숨을 돌렸다. 그리곤 각자 자신만의 기합을 넣으며 다시 레이스에 임했다. 어떤 러너는 전력 질주와 걷기를 무한 반복하기도 했다. 위아래로 흔들림이 많았고, 너무 숨차 보이는데도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결국 완주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포기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달리기에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 21.095Km까지 3Km가 남았을 즈음, 옆구리 통증이 느껴졌다. 달리는 것뿐만 아니라 숨 쉬는 것도 힘이 들었다. 9분대 정도로 뛰다가 못 참을 정도면 걷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나에게 주문을 걸었다. '노력해서 안 되는 건 없다.'라고. 나는 할 수 있다는 말을 속으로 외쳤고, 나중에 소리 내어 말하며 뛰었다. 너무 간절히 해내고 싶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출발선에 가까워졌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적어도 걷지는 않았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적어도 주저앉지는 않았다.'로 바꾸며, 마지막 페이스메이커의 뒤를 바짝 쫓아 끝내 결승선을 통과했다. 나를 믿고 응원하며, 포기하지 않았기에 결국 해낼 수 있었다.
하프를 완주하는 데 걸린 시간은 2시간 42분. 아쉬움이 가득 남는 기록이었다. 기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페이스에 맞춰 달리지 못했고, 잘 달리는 사람들과 나를 끊임없이 빅 하며 마음이 무너졌던 것이 너무 아쉬웠다.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얼굴에 웃음이 서리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째 하프이자 나의 첫 오프라인 마라톤 대회는 나에게 생채기로 남았다. 그리고 체력 강화라는 숙제를 안았다. 체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 꾸준히 달려온 사람들 속에서 나는 그저 초보였다. 도전했기에 얻은 실패였고, 귀한 깨달음이었다.
내가 만난 시인들은 하나같이 다른 시인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그려나가고 있는 좌표에 충실할 뿐 다른 이들의 동선을 염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당연히 누구와 비교되는 것도 마뜩잖아했다. 그것은 부단히 자기 부정과 자기 갱신을 집행해 본 자들이 가닿은 '자유로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김도연 <세속 도시와 시인들> (위즈덤하우스, 2016) 중에서
나는 알고 있다. 고통을 통과하고 그 과정을 오롯이 스스로 견뎌야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비참한 처지를 '단련의 계기'로 삼으면 된다는 것을. 대부분 혼자 달렸던 나의 24개월.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으며 내 길을 왔다. 지금도 나의 성장에 집중하며 나만의 색깔을 가진 또렷한 러너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나답게 달리고 성장하기 위해서 수많은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야 한다. '나라는 사람'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해야 행복해질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제 갓 달리기를 시작했거나, 함께 달리는 경험을 앞둔 누군가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결국 해내는 힘은 내 안에서 나와요. 그러니 들리지 말고, 나에게만 집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