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저술자이자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단 하루로 거르지 않고 숲과 호수 근처를 산책했다고 한다. 그는 산책을 통해 돌멩이 하나, 야생화 한 송이, 나무의 나이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관찰했고, 자연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몸짓을 읽었다. 소로의 산책은 '영감의 원천'이었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한 '일상 속 여행'이었다.
소로가 '걷기'로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면, 나는 '달리기'로 자연을 즐기고 생물들과 교감했다. 집 근처 생태공원을 달리면서 따사로운 햇빛을 만끽했고, 청둥오리, 다람쥐, 개구리, 지렁이 등 온갖 귀여운 생물들과 마주쳤다. 새벽에 달릴 땐 나뭇잎에 매달린 아침 이슬의 반짝임에 마음을 빼앗겼고, 낮엔 싱그러운 초록빛 나무들과 우아한 꽃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밤엔 은은한 어둠 속에서 찌릉릉 맴맴 하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근사하게 달리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자연 속을 달리며 행복감을 느끼는 러너였다.
그랬던 내가 하프마라톤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더 멀리, 더 빨리 달리는 것'에 관심과 열망이 생겼다.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려면 자연을 즐기며 달리는 '한량 러너'에서 '호전적 러너'로 변신해야 했다. 그러려면 지금처럼 마냥 명상하듯이 달리는 것 말고 뭔가 다른 의식적인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부터 내 마음은 하프 결승선에 있었다. 하프 완주를 위해 달리기 훈련 기술과 자세에 대한 책, 온라인 자료, 다양한 영상을 찾아보며 계획을 세우는데 열의를 불태웠다. 지구력을 키우고, 스피드 높이고, 체력 기르는 것 이 세 가지를 해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5Km 장거리 달리기부터 개인 PT, 언덕 훈련, 인터벌 훈련 등 혼자서 계획을 세워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태어나 운동 훈련을 해본 적도 없고 혼자 슬렁슬렁 달리던 러너가 매일 한계까지 달리니 몸이 버텨내질 못했다. 야심 차게 계획을 세운 게 무색하게도 단 6일 만에 번아웃이 되고 말았다.
'니 목표는 완주자나!' 내 안의 다른 자아가 처절하게 외쳤다. '니 달리기의 핵심 가치는 '즐거움'이자나. 러너로서 성장하는 것도 즐거운 요소 중 하나일 뿐이야.' 연이어 다른 외침도 들렸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프마라톤에 처음 도전하는 나는 '경험'과 '완주'가 가장 큰 목표였다.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건강하고 활기차게 최선을 다해 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마인드를 세팅했다. 무리하지 않고, 내 체력과 상황에서 소화할 수 있는 조그마한 과정들을 차근차근 즐겁게 해 나가기로.
'완주'라는 기준에 맞게 훈련량을 조절하고, 일요일은 온전한 '쉼'으로 채웠다. 월, 수, 금요일은 1Km당 평균 속도 6분 50초대로 공원을 7Km 달렸고, 화, 목은 한 시간씩 개인 PT를 받으며 하체 중심으로 몰입해서 근력 운동을 했다. 토요일에는 비대면 마라톤 10K에 참여해 동기 부여도 하고 긴장감을 느끼며 달렸다. 또한 달리러 나가기 전 유튜브로 달리기 영상을 보며 자세를 익혔다. 달리기 선수들은 자세와 리듬이 일정했고, 시원시원하게 다리를 뻗었으며, 어떤 고통이나 힘듦이 느껴지지 않는 의연한 몸짓과 표정을 지었다. 달릴 때 머릿속에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과연 이 정도 훈련으로 내가 세운 목표점에 다다를 수 있을까?', '나도 트랙에서 질주-휴식-질주-휴식을 반복하며 목에서 피맛이 날 정도로 달려봐야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혔다. 훈련을 하면서도 내 훈련량에 대해 의심과 불안 사이를 서성였다. 누군가에게 피드백을 받거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훈련하니 내 계획과 실력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마라톤에 출전하는 러너라면 대부분이 한다는 언덕 훈련, 인터벌 훈련(100미터 질주 X4회)은 부담스러워서 제외했기에 마음이 찝찝했다.
한 가지 일을 이루기 위해 간절히 몰두하면 뜻밖의 쉬운 해결법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을까? 무리가 되지 않으면서도 훈련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니 뜻밖의 소소한 달리기 훈련법 세 가지를 터득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지속주에서 마지막 500m는 80-90% 정도 힘으로 최선을 다해 스피드를 올렸다. 일명 빌드업 훈련을 했다. 두 번째로 언덕 훈련은 유명한 언덕 훈련 코스를 가지 않고 집 근처에 있는 얕은 언덕을 한 번에 5회 정도 오르락내리락하며 언덕을 대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를 익혔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헬스장에 갈 때마다 트레드밀을 이용해서 인터벌 훈련을 했다. PT가 끝나면 트레드밀에서 페이스 6' 00''으로 10분 정도 달리며 속도감 익혔고, 2분 열심히 달리고, 1분 살살 달리고를 반복하며 아주 귀여운 수준으로 인터벌 훈련을 했다. 그리곤 혼자 만족감에 킥킥대며 웃었다. 이렇게 나만의 '소소한 달리기 훈련법'을 만들었다.
일상 달리기에 몇 가지 작은 훈련을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하프마라톤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스피드 면에서는 평소에 1Km를 7분 20초대로 달렸는데 6분 50초대로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고, 10Km 마라톤에서는 개인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근력 운동을 체계적으로 하며 몸을 만들어 나가는 기쁨과 폭발적인 힘의 매력을 느꼈다. 근력 운동을 하니 확실히 몸 구석구석 근육과 관절의 작동을 더 예민하게 느끼며 있는 힘껏 달리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달리면 달릴수록 정신력이 강해지는 경험을 했다. '네가 완주할 수 있겠어?'라고 의심과 불안의 속삭임이 들려도, 일단 달리고 나면 속삭임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자신감이 한껏 올라갔다.
이렇게 나는 나의 달리기 코치가 되었다. 달리기를 하면서 나는 더 주체적이고 단단한 사람이 되고 있다. 처음엔 의욕만 앞서서 과한 훈련 계획을 세웠지만 차즘 내 달리기 목표와 실력에 맞게 계획을 수정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상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훈련 방법을 발견해 나만의 훈련법도 만들 수 있었다. 매번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진심을 다해 달리면서 차근차근 성장했다. 그 모든 여정의 주인공은 나였기에 더 흥미롭고 즐거웠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달리기'를 꾸준히 쌓아서 '내가 할 수 없는 달리기'를 마침내 해낼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