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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릇 Mar 07. 2021

MINARI

(스포가 있는 듯 한 지극히 개인적인 영화 감상기)

밤잠을 설쳤다. 가위에 눌린 듯 잠이 들어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있었고, 나는 일어나자마자 쪼그라든 페트병을 다시 펴내듯 깊은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의 불편함이 있는 밤이면 나는 늘 이렇게 잠을 힘겹게 이룬다.




어제 영화 미나리를 봤다.


해외에서 엄청나게 상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에, 나는 또 국뽕이 차올라서 영화가 개봉을 하자마자 주말에 영화를 보러 갔다. 코로나 이후로 참으로 오랜만의 극장 방문이었다.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영화를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미국에서 서로를 구원해주자며 한국을 떠난 한 가족의 이야기.

낯선 아칸소 땅에서, 농장을 일으켜 가족에게 무언가 보려 주려는 집안의 가장 제이콥(스티븐 연), 농장에 대한 회의감은 있지만 병아리 감별사를 하며 남편을 따르는 모니카(한예리). 그리고 그들의 어린아이 둘. (앤과 데이빗) 부부가 일을 할 때, 어린 남매를 돌봐주기 위해 외할머니 순자(윤여정)가 미국으로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대단한 서사라기보다는, 어찌 보면 조명받지 못하는 사소한 삶에 대한 지독하리만큼 구체적이고 섬세한 표현에 엄청나게 몰입을 해서 영화를 봤다.


나는 미국 교포 3세도 아닌데, 왜 이렇게 밤잠을 설칠 정도로 영화가 내 마음을 쿡쿡 찌르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두 부부의 한 장면 장면들이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시렸고,
순자의 대사 하나 행동 하나가 우리 엄마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제이콥이 바퀴 달린 집으로 가족들을 이끄는 장면부터 나는 마음이 부서졌다. 나의 서울 원룸살이와 다를게 뭔가. 대학을 오면서 이사 온 보증금 500에 38만 원짜리 내 원룸이 생각났다. (지금까지도 나는 원룸살이를 하고 있다. 하 맴찢.)


농장으로 성공해 보이겠다고 가끔은 너무하리만큼 고집스러운 제이콥의 행동들을 보면서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고집은, 한편으로는 가장으로써의 엄청난 책임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 서울' 대학이 뭐였나 싶었지만, 20살의 나에겐 인 서울 대학이 제이콥의 농장과도 같은 거였다. 인 서울 대학을 다니기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고, 나는 고집을 부려 재수를 하면서까지 결국 인 서울 대학을 갔다. 내 고집을 부리면서까지 감행을 한 것이기에, 두 어깨엔 엄청난 책임감이 있었다.


영화 속에서 모니카에게 '나도 가족에게 무언가 해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하고 소리치는 제이콥의 대사에 엄마 아빠에게 어떻게든 성공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나의 간절함이 생각났다.


    순자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눈물이 나서 혼났다.

당신의 자식들이 어렵게 사는 장면을 보면서도 자식들이 상처 받을까 바퀴 달린 집이 재밌다며 유머러스하게 넘기고,  한국에서 가져온 고춧가루, 멸치, 한약들을 펼치는 모습에 단박에 나는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라는 이름은 이상하게도 자꾸 눈물을 불러일으킨다. 눈이 얼룩얼룩해진다.


매번 서울에 오실 때마다, 우리 엄마도 양손 가득 무언가를 그렇게 가져다주셨다. 일 년에 네댓 번은 택배로 자취생 구원 키트가 도착한다. 나는 실제로 순자가 가져온 것들을 전부 한번 이상은 받아본 것들이었다.


나이 든 몸을 이끌고 부부를 위해 기꺼이 손주들을 돌봐주기 위해 비행기를 탄 순자를 보면서, 부모의 한없는 내리사랑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더 좋았던 건 영화에서는 신파를 자극하는 장면이 없이 덤덤하게 가끔은 웃음이 나게 묘사한 것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실제 가족들은 마음을 곧이곧대로 전달하는 법이 없지 않나. (적어도 우리 가족은 그렇다.) 가족의 마음은 고춧가루에, 안쓰러운 모습을 애써 무시하려는 가벼운 농담들에 담겨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모니카의 모습은 일부 내가 보였고 , 가끔은 우리 엄마가 보였다.


순자가 미국으로 온다는 소식에, 모니카는 서둘러 아이들을 씻기고 가장 이쁜 옷을 입혀 기다린다. 하지만 가장 그리워한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모니카는 어버어버거리고, 보고 싶었다는 말을 전하지도 못한다. 엄마가 보는 우리 집 형편이 그저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밖에 없다. 이후 순자가 쓰러져 병원에 있는 장면에서 모니카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미안해.'라는 말을 건넨다.


정확히 모니카의 대사는 차마 내가 엄마에게 전하지 못한 말이었다. 서울에 아등바등 살고 있고, 엄마의 희생에 나는 응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부끄럽다. 아직은 내게 제이콥과 같은 아집이 있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성공한 삶'까진 이제 거창한 말이고, 어느 정도 여유로운 삶이 왔을 때, '당신의 희생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기에 꺼내지 않은 그 말이었다.


모니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손주를 봐주기 위해 미국으로 부른 엄마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모니카도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그 누구보다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게 오래 기다려주지 못하는 존재였던 거다. 당신이 쓰러져서야 모니카는 결국 이기적이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꺼낸다. 나는 두 어떤 말이든 늦지 않게 꺼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장면들에서 모니카는 줄곧 나였다.



모니카는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가끔 남편의 아집스러운 모습이 어린 두 남매에게 어려운 상황이 될 것 같을 땐 남편과 죽어라 싸웠다. 지금은 어렴풋하지만 내가 영화 속 남매의 나이었을 때, 우리 엄마 아빠도 엄청나게 자주 싸웠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우리 자매는 "Don't fight!"라는 메모를 써 비행기를 날릴 용기는 없었고, 그저 방에 문을 잠그고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실제 경상도 사람 두 명이 싸우면, 집이 떠나갈 듯 언성이 높고, 격앙된 말투는 엄청나게 살벌하다.) 제이콥과 모니카의 싸움이 삶에 치여 지쳐가는 비명이었음을 느낀다. 이 장면들에서 나는 모니카에게 우리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마다, 나는 인물에게 너무나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절절한 마음. 그동안 숨어있던 마음들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터질 것 같은 마음에 그 어떤 생각들을 할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고서 이렇게 빠져나오지 못할 수가 있었나 싶다.


미국 이민 가정의 이야기지만, 우리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서사다. 비단 나뿐이겠나. 각자의 사정들을 살아온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개인의 서사를 이 영화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었을 테다.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수상 소감이 떠올랐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아이작 감독의 개인적인 서사를 녹여 만든 이 영화 한 편은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상황을 생각해보게끔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실로 창의적이다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해외에서 온갖 상을 미나리가 휩쓸고 있었나 보다.


샤브샤브에 넣을 미나리를 보면, 눈물이 그렁그렁 해질지도 모르겠다.

한 며칠은 미나리를 앓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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