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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드저널 Nov 03. 2020

매일의 알고리즘

MY DAILY ALGORITHM

출근 준비와 등원 전쟁을 치르는 정신없는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출근 룩을 SNS에 기록하는 아빠가 있다. 그의 피드는 자신의 취향과 체형, 그리고 마음가짐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데일리 룩으로 가득하다. 10년 가까이 매일 다른 옷차림을 조합하며 요령 하나를 터득했다. 꽤나 신속하고 분명한 지승렬의 패션 알고리즘 이야기.




‘나 옷 입는 걸 좋아하는구나’를 언제 처음 느꼈나요?
제가 초등학생 무렵, 그러니까 1990년 대 초반부터 나이키 조던, 아디다스 엑신, 프로스펙스 헬리우스 등 유명 브랜드 신발이 국내에 쏟아져 나왔어요. 같은 반의 잘사는 친구 한 명이 조던 7을 신고 온 걸 보고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른 기억이 나요. 아쉽게도 엄마는 헬리우스를 사주셨지만, 언젠간 나도 꼭 한번 조던을 신어보고 싶다는 욕망이란 게 그때 처음 생겼어요. 아직도 기억해요. 당시 조던 7이 9만 9000 원, 프로스펙스 헬리우스가 4만9000 원.(웃음) 용돈을 받기 시작한 중학생 이후부터는 동대문에서 직접 옷을 골라 사 입었어요. 이른바 나쁜 짓, 이를테면 급식비나 문제집 비용을 조금씩 당겨 맘에 드는 옷을 샀죠.(웃음)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IMF 외환 위기가 터져서 집안 사정이 정말 어려웠어요. 안양에서 산본, 산본에서 안산으로 전전하는 신세였거든요. 그래도 저는 어떻게 해서라도 멋있는 옷을 사 입고 싶어서 지금은 현대시티아울렛이 된 거평 프레아에서 몇 시간씩 랄프 로렌 구제 티셔츠를 찾아다녔죠. 학창 시절 소풍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우리만의 패션쇼가 따로 없었다니까요. 졸업하고 패션업계에서 일을 시작했으니 옷은 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옷을 잘 입기 위해서는 일단 옷을 많이 사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옷이 많으면 옷을 잘 입을 확률은 높겠죠. 하지만 옷을 잘 입는다고 반드시 옷이 많은 건 아니에요. 자신만의 기준이나 취향 없이 옷장에 옷을 많이 쟁여놓고 있다면 그 또한 잘 입는다고 볼 수 없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을 보고 “옷 잘 입네”라고 하진 않잖아요. 안타까운 건 우리 사회는 암묵적으로 옷을 많이 사면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깔려 있다는 거예요.


저는 ‘남과 다른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과 ‘유행을 따르려는 심리’, 이 둘 사이를 오가며 쇼핑을 해요. 자신만의 패션 기준이 분명한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요.
무엇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모르겠다 싶으면 TPO에 따라 옷차림을 구상해보세요. 회사 갈 때 입는 옷, 주말에 입는 옷, 여행 가서 입는 옷, 크게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각 상황에 따라 이상적 이미지를 핀터레스트나 SNS로 수집하고, 본인 취향에 끌리는 시안을 선별한 뒤, 당장 조합이 가능한지 옷장을 확인해보세요. 마지막으로 꼭 필요하지만 옷장에 없는 아이템을 하나씩 구입해서 나에게 맞는 딱 ‘한 착’을 맞춰보는 거예요. 이 한 착을 기본으로 조금씩 스타일을 응용하는 거고요. 저 역시 10년 넘게 만들어놓은 나만의 스타일을 기본으로 옷을 사고 있어요. 이미 가지고 있는 옷들과 어떻게 조합해서 입을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으면 아무리 예뻐도 안 사요. 반대로 제 옷장에 들어온 이상 대충 맞춰 입어도 웬만한 조합이 가능하죠.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은 동시에 이리저리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는 걸 의미해요. 즐거움과 번거로움이 공존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아주 피곤한 삶이에요. 하다못해 양말 하나도 대충 고르는 법이 없죠. 전체적으로 조합이 잘 안 나오는 날에는 이것저것 맞춰보다 회사에 지각한 적도 있어요.(웃음)


두 딸의 아빠로서, 출근을 준비하는 회사원으로서, 데일리 룩을 기록하는 패피로서 그야말로 정신없는 아침이겠군요.
2012년 블로그에 처음 데일리 룩을 올릴 때에는 전날 모두 골라놓고 잤어요. 다림질까지 다 해놓고 보기 좋게 옷걸이에 걸어놨죠.(웃음) 지금은 내공이 쌓여서 아침에 재빠르게 차려입을 수 있어요. 그냥 잘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해요. 퇴근 후 집에 가면 아이들 저녁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건 제 몫이에요. 심지어 애들이랑 같이 자고요. 아이들과 있으면 지지고 볶고 정말 정신이 없죠. 밤에 무언가 하고 자야지 싶다가도 너무 피곤하니까 나도 모르게 잠들기 일쑤고요. 생각해보니 아빠가 되고 나서 ‘내일 뭐 입지?’ 제대로 고민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요. 5시 30분쯤 일어나 6시부터 50분 정도 운동하고 씻은 다음 방에 들어가면 7시 5분. 간단하게 《성경》 말씀 읽고 기도하고 나면 딱 7시 15분이에요. 40분에 집을 나서야 출근 룩 찍고 회사에 8시 20분까지 도착할 수 있어요. 저만의 아침 루틴이 있죠.


30분 남짓한 시간에 데일리 룩이 완성되는 거군요.
사실 그 정도도 안 걸리는 거 같아요. 머리 말리고 헤어 세팅하는 시간까지 있으니까. 물론 일반 남성의 출근 준비 시간보다 오래 걸리긴 해요.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어제 혹은 최근에 입은 옷은 다시 입지 않는다’라는 저만의 원칙을 지키려고 해요. 모자, 셔츠, 바지, 신발, 타이 등 매일 다른 조합으로 다양한 스타일을 연출하려고 하죠.





            
















승렬 님만의 데일리 룩 규칙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오늘처럼 인터뷰하는 특별한 날에는 전날 밤 딱 하나만 생각해놓고 자요. 가령 신발이라고 하면, 최근 2주 동안 한 번도 안 신은 게 뭔지 살펴봐요. 빨간색 반스다 싶으면 딱 그걸 정해놓는 거죠. 다음 날 아침 빨간색 반스를 기본으로, 검은색 카고 바지에 빨간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어봐요. 모자는 상의나 하의 컬러에 맞춰 블랙이나 레드 계열로 맞춰주고요. 만약 내일 머리를 감기 싫으면 그날 데일리 룩의 시작은 모자인 거죠.
그래도 생각이 안 나면 인스타그램 피드를 살펴봐요. “최근에는 편한 복장 위주로 입었으니 오늘은 포멀하게 입어볼까?” 또는 “어제는 전체적으로 올리브 톤이었으니 오늘은 그린 톤으로 맞춰볼까?” 하고 전체 스타일 무드에 변주를 주는 거죠. 날씨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요. 우선 비가 오는 날이면 아끼는 신발은 모두 제외. 그중 지난주에 신은 신발 제외. 그러면 두 켤레 정도가 남아요. 또 어제 입은 옷이랑 컬러나 스타일이 겹치면 그 신발도 제외. 최종적으로 남은 하나로 데일리 룩을 시작하는 거예요. 나름 AI처럼 알고리즘이 있어요. 매일 옷차림에 신경 쓰며 살다 보니 이 작업만 10년 가까이 했네요.(웃음)


입던 대로 입다 보니 관성이 생겨 시도 자체가 힘든 사람이 많아요. 특히 나이가 들수록 패션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고요.
저보다 딱 열 살 많은 사수이자 멘토인 차장님 한 분이 계세요. 업무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굉장히 훌륭하시고, 주말에는 자동차 정비를 배울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본받을 게 많은 분이죠. 그런데 차장님은 패션 회사에 다니는 직원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편하게 입으셨어요. 발가락 양말에 슬리퍼 찍찍 끌고.(웃음) 문제는 외부 미팅 나갈 때마다 기자분들이 차장님의 후줄근한 복장을 보고 전문성을 판단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게 너무 싫더라고요. 속상한 마음에 차장님 옆에 붙어 다니며 “딱 한 번만 바꿔봐요, 딱 한 번만.” 2년 가까이 설득했어요. 결국 뿔테 안경에 재킷 그리고 구두까지 딱 한 착을 바꿨는데, 그 이후부터는 무시하지 않더라는 거죠. 심지어 사모님한테 바람났냐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해요.(웃음) 옷차림 하나가 사람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버린 거죠. 뿌듯한 건 차장님의 패션 세계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화이트 팬츠를 입고 여행 룩을 연출하기도 해요.(웃음)


어쩌면 단 한 번의 과감한 시도가 필요한 거군요.
맞아요. 누군가의 도움이 있다면 훨씬 쉽게 시작할 수 있죠. 사실 차장님이 제 첫 번째 패션 컨설팅 대상이었어요. 나중에 비슷한 취지로 강연이나 사업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도 해봐요. 패션은 제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큰 축이 되어버렸어요. 근래 아내가 아프면서 지칠 만한 상황의 연속이었어요. 그럼에도 데일리 룩은 포기하지 않았죠. 물론 ‘아내가 아픈데 지금 내가 옷차림에 신경 쓰고 있을 때야?’ 현타가 올 때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패션마저 포기하면 난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을 다잡는 데 옷차림이 중요한 역할을 했네요.
‘의관정제’라는 단어가 있어요. 바른 옷차림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는 뜻이에요. 제가 장교 출신이라 그런지, 의관정제라는 말에 깊이 공감을 해요. 구겨진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편한 러닝화를 대충 신었을 때와 잘 다린 셔츠와 줄이 잡힌 바지에 은은한 광을 머금은 구두를 신었을 때 마음가짐이나 행동은 분명 다르거든요. 요즘도 일상이 지치고 힘들 땐 좀 더 차려입으려고 노력해요. 제 기준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아이템은 ‘타이’예요.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운동을 한다고요?
살기 위한 이유가 가장 커요.(웃음) 무리한 야근이 이어지던 어느 날, 출근 중 허리에 담이 온 적이 있어요. 재활 목적으로 적합한 운동을 찾다가 커틀벨을 이용한 전신운동을 알게 됐죠. 이 운동은 몸에 익으면 집에서도 혼자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전체 50분 중 20분은 준비 스트레칭하고, 나머지 20분은 웨이트 운동, 나머지 10분은 마무리 스트레칭하는 순서로 이루어지죠. 그렇게 매일 아침 50분 운동을 통해 얻는 체력으로 하루를 버텨요. 2016년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잠을 편히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사이 이직하면서 업무도 늘었고, 아내와 장모님이 많이 아팠어요. 버거운 일들이 연속으로 터지다 보니 체력이 있어야 버틸 수 있겠더라고요. 정말 살기 위해 운동을 시작한 거죠.


《옷장 속 인문학》이라는 책에 “패션은 옷이 아니라 몸을 공부하는 게 먼저다” 라는 구절이 있어요.
6년째 커틀벨 운동을 하면서 여태 몰랐던 제 몸에 대해 알았어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엉덩이가 크고, 고개가 앞으로 나왔고, 어깨가 굽어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랜 시간 거북목 상태로 일하다 보니 몸이 전체적으로 굳어버린 거더라고요. 신기하게도 운동을 하면서 안 맞던 옷이 맞게 된 경우도 있어요. 전체적으로 몸의 밸런스가 잡히면서 좀 더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해볼 수 있기도 하고요.


10년간 데일리 룩을 기록해오면서 싱글에서 남편으로, 남편에서 아빠로 역할의 변화가 있었어요. 옷차림에도 변화가 생겼나요?
결혼 초기에는 미술을 전공한 아내가 종종 조언을 해줬어요. 가끔 의외의 솔루션이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그때마다 색감에 대한 안목이 있는 아내의 한마디가 해결책이 되곤 했죠.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는 아내가 제 옷을 못 사겠다고 하는 거예요. 꾸준히 데일리 룩을 올리면서 나만의 스타일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저와 아내가 생각하는 예쁨의 기준이 달라진 거더라고요. 아빠가 되고 나서는 평일과 주말 사이 패션 콘셉트가 나뉘는 것 같아요. 주말용 아빠 TPO가 추가됐거든요.(웃음) 클래식만 고집할 때도 있었는데, 이제 주말에는 편안하고 실용적인 옷을 찾는 게 기본이 됐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옷을 살 때 원단과 재질, 자주 세탁해도 괜찮은지 살펴보게 되더라고요. 가끔 옷이 수축될까 봐 세탁기 안 돌리고 차가운 물로 손빨래도 하고요. (웃음)


주말마다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들었어요. 딸아이 스타일링도 직접 하나요?
딸아이 스타일링은 아내가 해요. 일단 저는 여자 옷을 잘 몰라요. 남자 옷과 여자 옷은 재질부터 실루엣까지 전혀 다르다 보니 제가 손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아들이었다면 괜찮은 슈트 하나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이유부터 남자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패션 노하우에 대해 가르쳐줬겠죠. 쇼핑도 자주 다녔을 거고요. 다만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아이들이 자라 아빠와 데면데면할 때가 오면 패션이라는 키워드가 그 기간을 단축시켜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은 핑크색을 좋아하는 첫째 딸 취향에 맞춰 다 같이 ‘깔맞춤해’ 입는 것으로 만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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