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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드저널 Dec 14. 2020

더 뉴그레이가 만난 400개의 사랑

2시간 동안 1000번의 셔터를 눌러 아빠의 인생 사진 한 장을 남기는 이들이 있다. 아버지들을 위한 메이크오버 프로젝트 ‘더 뉴그레이’를 운영하는 권정현과 여대륜의 이야기다. 긴 장마가 이어지는 늦여름 오후, 고소한 냄새 가득한 작은 피자집에서 긴 대화를 나눴다. 사진 뒤 감춰진 저마다의 사연에서 그들은 400개의 사랑을 만났다고 고백한다. 그토록 아버지가 미웠지만, 이제는 누구보다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두 청년과 나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






























각자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현) 남성 패션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헬로우젠틀’ 대표 권정현입니다. 우선 헬로우젠틀은 크게 남성 스타일링 서비스를 제공하고, 기업 강연으로 패션 컨설팅을 합니다. 아버지들의 패션을 바꿔주는 메이크오버 프로젝트 ‘더 뉴그레이’는 콘텐츠 비즈니스에 속하고요. 시니어 모델을 대상으로 코칭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최근에는 남성 쇼핑몰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남성 패션과 관련해 거의 모든 일을 한다고 보시면 돼요.(웃음)
(대륜) ‘서른 즈음에’ 노래가 흘러나오면 흠칫하는 내일모레 서른인 여대륜입니다. 저는 처음에 헬로우젠틀 직원이었다가 지금까지 어찌어찌 붙어 있다 보니 공동대표가 됐네요.(웃음) 형이 기획을 하면 저는 행동대장처럼 이끌고 가는 편입니다. 더 뉴그레이에서는 여러 브랜드와 미팅을 잡고, 촬영을 진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참, 최근에는 피자가 너무 좋아 연남동에 작은 피자집을 오픈해 운영하고 있지요.


더 뉴그레이 프로젝트로 2018년부터 지금까지 427명의 아버지를 만났어요. 자신을 제대로 가꿔본 적 없는 아버지들에게 2시간은 꽤 의미가 남달랐을 것 같아요.
(정현) 처음엔 대부분 불편해하세요. 주말에 등산도 가야 하고, 골프도 쳐야 하는데, 억지로 끌려온 경우가 70% 이상이거든요. 심지어 싸우는 경우도 있었어요. 뭘 이런 걸 하냐며 당장 환불하라고. 자제분이 몰래 와서 “이벤트 당첨돼서 무료”라고 말해달라는 경우도 있었고요. 하지만 나중에는 다들 “모델이나 한번 해볼까” 한다는 거예요. 본인이 봐도 괜찮거든요.(웃음)
(대륜) 멋스럽게 차려입고 촬영하려고 하면 보통 어색해서 굳어 계세요. 그러면 저희는 카메라 의식하지 말고 가족들 보면서 자연스럽게 걸으시라고 말하죠. 갑자기 웃어달라고 하면 어색할 수 있으니 저희가 옆에서 먼저 “하하하” 실없이 웃고요. 그러면 옆에서 가족분들이 덩달아 웃으세요.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심지어 촬영하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니 불편하시겠죠. “언제까지 찍어요?”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오른 게 보여도 “자,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아버님!” 하면서 1000장 정도 찍어요.(웃음) 전문 포토그래퍼가 아니다 보니 러키 컷 하나 뽑으려고 무턱대고 찍는 거죠. 어느 날 문득 의아하더라고요. 내켜서 온 것도 아니고 심지어 열악한 조건들뿐인데, 왜 다들 나중엔 애틋해하시는 걸까.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용돈을 쥐여주기도 하고, 촬영 끝나고 근처에서 술 한잔하자며 기다리시고, 가족들 죄다 데리고 하루에 두 끼 모두 피자 드시러 오는 이유가 말이에요.


촬영하면서 포착한 아버지들의 공통점이 있다면요?
(정현) 기본적으로 항상 손이나 발을 어딘가에 걸치세요. 주변에 벽이나 나무가 있다 싶으면 무의식적으로 손이 올라가나 봐요.(웃음) 아니면 손으로 재킷을 잡으며 이른바 ‘엄근진’ 포즈를 하시고요. 옷차림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부분 컬러가 어두컴컴해요. 똑같은 블랙이라도 왠지 더 칙칙한 느낌이랄까. 아니면 몬드리안 색감이 듬뿍 담긴 화려한 셔츠를 많이들 입으세요. 신발은 운동화와 구두 사이 정확히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걸 신으시고요.


이런 패션을 이른바 ‘아재 패션’이라고들 해요. 아재를 위한 스타일링 팁이 있을까요?
(정현) 우선 핏이 가장 중요해요. 바지 길이가 너무 길지 않아야 하고, 사이즈는 배 둘레가 아니라 허리에 맞춰야 해요. 두 번째로 헤어스타일. 나이가 들수록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귀한 탓에 기르시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깔끔하게 걷어내는 게 훨씬 멋스러워요. 마지막으로 안경은 아세테이트 뿔테 쓰는 걸 추천해요. 동양인 특성상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지만, 뿔테 하나로 충분히 선명한 인상을 만들 수 있거든요.



더 뉴그레이를 신청하는 사람 대부분이 아들과 딸이라고 들었어요.
(정현) 아빠가 변신한 모습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으면 하는 맘으로 신청하는 경우가 많아요. 갈수록 아빠가 우울해하거나 적적해하다 보니 자식 입장에서 안쓰러운 거죠. 실제 은퇴 선물로 신청하는 경우도 많고요. 물론 지금 아빠 모습이 너무 별로여서 신청하는 경우도 있어요.
(대륜) OTP 번호 몇 개 띠딕 누르면 끝나는 1분짜리 효도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2시간 동안 온 가족이 시간 들여 남는 게 비포 애프터 사진 한 장 같지만, “아빠 젊었을 때 패션은 말이지~” 하고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며 색다른 추억이 쌓이는 거죠. 아빠가 멋스러운 사진으로 프로필을 바꾸고, 주변에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자식 입장에서 뭉클하겠죠.


특히 기억에 남는 만남이 있나요?
(대륜) 2018년 10월 19일 이후 수많은 아버님을 만났지만, 유독 우리를 보며 자꾸 눈물을 글썽이던 경주 아버님이 생각나요. 왜 눈물이 났을까요? 더 늦기 전에 경주에 내려가 하룻밤 신세 지면서 꼭 한번 여쭤보고 싶어요.
(정현) 저는 사위가 신청해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만났던 때가 생각나요. 재밌게 촬영하고, 인사하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장모님이 우시는 거예요. 저희는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울었고요.(웃음) 2시간 만에 이런 감정이 들 정도면 우리가 나름 괜찮은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이 든 것 같아요.


가장 또는 아빠, 남편이라는 이름에 가려 나다움을 포기하며 살아온 기성세대가 지금의 ‘아재’예요. 그런 의미에서 아재 패션이란 단어가 왠지 슬프게 다가오네요.
(정현) 촬영을 마치고 아버지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안타까울 정도로 ‘나’는 없어요. 늘 가족이 우선이라 자신을 가꿔본 적이 없는 거죠. 무언가 시작할 때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은 게 패션이니까 이제는 패션을 시작으로 좀 더 재밌고 즐거운 인생을 사셨으면 좋겠어요. 다들 느끼잖아요. 옷차림 하나로 온 가족이 웃고, 스스로도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요.
(대륜) 작년 여름, 현대자동차 화보 촬영을 위해 상하이에 다녀왔어요. 대략 30명의 과장님·차장님과 동행했는데, 다들 나름대로 멋지게 입고 오셨더라고요. “아빠들 메이크오버하는 일, 이제 별로 안 남았네” 하고 형에게 말했더니 “그 시기를 우리가 앞당기자”라고 답하더라고요. 나중에 우리가 나이 들었을 때는 ‘아저씨들이 멋스럽게 꾸미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으면 좋겠어요.























메이크오버 프로젝트 이외에 시니어 패션 코칭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정현) 시니어 모델을 위한 메이크오버 프리미엄 버전이라고 보시면 돼요. 매주 동대문 무신사에서 8명의 시니어 모델분을 모셔 코칭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 ‘아저씨즈’라는 모임은 단순히 옷 잘 입기 위해 필요한 노하우만 배우는 곳은 아니에요. 요즘 시대에 통하는 비결까지 익히는 곳이죠. 예를 들어 젊은 친구들처럼 패션 사진 잘 찍는 법부터 SNS에 포스팅하는 방법까지 알려드려요. 실제로 줄곧 낙방하던 오디션이나 CF에 캐스팅되는 일도 늘어나고 있고요. 나름 시니어 모델계 방탄소년단 같은 존재세요.(웃음)

(대륜) 시니어 모델 아카데미가 거대한 반면, 개인 시니어 모델 혼자서 시장에 진입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예요. 아카데미 출신 위주로 선발하거나, 운 좋게 발탁되더라도 단기 채용하는 경우가 일쑤고요. 그래서 다들 아카데미에 목을 매면서 1년 동안 워킹 연습에만 어마어마한 액수를 투자하는 거죠. 하지만 저희는 아이돌 오디션이나 전형적인 입시 방식과 조금 다른 대안을 만들고 싶더라고요. 기본적으로 시니어 모델분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고, 뒤에서는 어떻게 혼자서 자립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서포터가 되고 싶은 거죠.


아카데미보다 멘토링에 가깝네요.
(정현) 그렇죠. 저희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최근에는 일방적으로 강의만 하지 않고 새로운 경험을 접하도록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죠. 한번은 요가 수업을 해보려고 각자 옷을 차려입고 오라고 했어요. 어떻게 입고 오시는지 제가 궁금했거든요. 골프 웨어라면 차라리 나은데,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묘한 패턴의 헐렁한 운동복을 입고 오시더라고요.(웃음) 약간 우스꽝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연 하나하나를 모아 애슬레틱이나 호텔 등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에 제안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대륜) 패션 브랜드에서 시니어 모델이 이렇게 화두가 된 적이 없어요. 우리가 기반을 다지고 있다는 자부심도 들고요. 어쩌면 문화의 변화는 줄곧 패션이 키인 것 같아요. 패션에서 시작하면 시니어 라이프스타일 영역도 더 개척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더 뉴그레이 프로젝트로 만난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엮어 〈THE NEW GREY〉 매거진을 발간했어요.
(대륜) 우선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400여 명의 아빠를 만났는데, 5060 세대 전체를 생각하면 아주 미미한 숫자잖아요. 더 뉴그레이 인스타 팔로어 수가 2만6000명이고, 카카오 1boon 페이지에서는 최대 20만 뷰까지 나오지만, 주요 소비층은 2030 세대거든요. 5060 세대까지 닿지 못해 늘 아쉬워요. 두 번째 이유는 인터뷰해주신 아버지들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지금 〈볼드저널〉 인터뷰이가 됐잖아요. 너무나 영광스러워요. 이와 비슷하게 아버지들에게도 자신의 이름과 이야기, 사진이 담긴 책을 선물로 드리고 싶었지요. 마지막으로 평범한 아빠들의 삶 속에도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어요.



사업적으로 보면 ‘중년과 패션’이 비즈니스 모델이지만, 그 이면에는 ‘가족과 아빠’라는 다소 감성적 키워드가 담겨 있어요. 사뭇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달리 생각해봤을 것 같아요.
(정현) 사실 제 아빠는 무능의 아이콘이세요. 경제적으로 무책임했고, 집안에도 소홀해 엄마가 모든 살림을 도맡으셨어요. 나이 들면서 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프다는 거예요. 한때는 ‘아빠처럼 책임감 없이 살지 말아야지’가 제 삶의 동기였어요. 그러다 더 뉴그레이를 진행하면서 수많은 형태의 가족을 만났죠. 대부분 화목했지만, 그 속에도 저마다 가엾고 쓸쓸한 아버지들이 있었어요. 그러다 문득 ‘아버지라는 존재들이 각자 애쓰면서 살아가는구나’ 하는 측은지심이 들면서 제 아빠도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 사랑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아들 도리는 하자’ 싶었죠. 요즘에는 아침에 목욕시키고 데이케어센터에 모셔다 드려요.
(대륜) 아빠에 대한 결핍, 저와 형의 공통점이에요. 저는 아빠가 살아 계시지만 보고 살지는 않아요. 제 기억 속의 아빠는 사업에 실패했고, 바람을 피웠고, 엄마를 때렸어요. 아빠 때문에 모든 ‘남자 어른’이 어려웠고, 미웠죠. 형이 ‘아빠’라는 키워드로 사업 제안을 했을 때에도 속으로 반발감이 든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제가 400명의 아버지를 직접 만났잖아요.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게 아버지구나’ 하며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깨진 거죠. 이전까지는 ‘내 아빠처럼 되지 말아야지’ 명확한 전제는 있지만, ‘어떻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늘 고민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여러 아버지를 만나면서 한 가지씩 힌트를 찾아가고 있어요. 대학까지 졸업한 딸을 위해 주말마다 신발 빨아주는 아빠, 월급보다 비싼 카메라를 사서 어릴 적 아이 사진을 찍고 이제는 추억하는 아빠, 딸과 일주일에 한 번은 소주 마시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는 아빠를 만났죠.


이제는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나요?
(대륜) 자식 기억 속에 오랫동안 진하게 남고 싶어요. 제 기억 속에 아홉 살 이후 아빠는 없지만, 엄마는 매 순간 함께했어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과 되도록 많은 걸 ‘함께’하고 싶어요. 옷도 같이 입고, 운동도 같이 하고, 사우나도 함께 다니고, 극장도 같이 다니고 싶지요. 자식이 커서 어린 시절을 되돌아볼 때 모든 순간순간에 든든히 존재하고 싶어요.
(정현) 저는 조력자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자식이 공무원을 하고 싶으면, 제가 아는 선에서 공무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시하는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무언가 시작하려고 할 때, 강요하지 않고 가볍게 조언할 수 있는 정도. 무슨 스타트업 조직 문화 같네요.(웃음)


마지막 질문이에요. 두 분은 아버지가 되었을 때 어떤 패션 스타일을 갖추고 싶나요?
(정현) 남성과 아빠 패션을 분리하고 싶지 않아요. 유희열이나 윤종신처럼 클래식을 기본으로 한 캐주얼 룩을 입고 싶어요. 슈트에 볼캡 쓰고 스니커즈 신는 아빠 패션이랄까요.
(대륜) 저는 아들과 옷장을 공유하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아빠, 나 내일 소개팅 가는데, 아빠 옷 입고 간다~” 하면 “아, 그거 내가 입을 건데...” 하고 투닥거리는 사이였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몸 관리도 열심히 해야겠죠.
(정현) 그런 의미에서 우리 둘 다 아들을 원하는 것 같아. 아들한테 옷 입는 법도 알려주고, 쇼핑도 하고.(웃음)
(대륜) 하지만 더 뉴그레이 신청한 사람은 죄다 딸이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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