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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 Dec 19. 2016

그림책 중독자의 그림책

고양이, 코알라, 그리고 살아 있는 것



제일 좋아하는 그림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지요? 저는 언제나 그런 질문이 대답하기가 어렵답니다. 좋아하는 게 무척 많은데 그중 제일이 무엇일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진짜 뭘까, 하고 골똘히 고민하게 됩니다. 며칠 전에도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무어라 대답을 못 드리고 헤어지고 말았네요. 제 마음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답을 하기 싫었던 게 아니었어요. 단지 어려웠던 거지요.

그래서 뒤늦게나마 편지로 답을 드립니다. 편지를 쓰려고 제 마음을 들여다보니, 좋은 그림책은 수없이 많지만 제게 특별하게 남은 책은 책에 얽힌 기억이더군요. 전문가가 권해주는 완벽한 그림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 찬 그림책을 상상하신다면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어요.


*

어떤 사람과 처음 만난 날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 또래 여자였고, 저처럼 편집자였지요. 우리는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신세 한탄을 했어요. 우리의 미래는 아주 어두운 것 같았고, 희망이 어디에 있을까 싶었죠.
그때 그 사람이 갑자기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내밀었습니다.
"이 책 봤어요? 난 이 책이 괜히 좋더라고요."
아, 나도 회사에서 봤는데,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는 다른 일을 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나에게 주려고 그 책을 가져왔다고 했어요.
'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물을 줄까? 참 신기한 사람이네…….'
조금 어리둥절했던 것도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그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다 읽고 나니 저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어요. 그렇게 나는 <살아 있어>를 기억하고, 다시는 잊지 않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어>(나카야마 치나츠 글, 사사메야 유키 그림, 보물상자)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다는 건 어떤 거지?



아, 살아 있다는 건 숨 쉬는 거네


아, 살아 있다는 건 소리 내는 거네



아, 살아 있다는 건 웃는 거네
아하하 아하하 아하하
아얏, 이마를 부딪쳤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아픈 거네

살아 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소리 내고, 움직이고, 자라고, 죽고, 먹고, 마시는 것. 아픔을 느끼고, 우스울 땐 웃는 것이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이 책은 말해요. 반대로 말하면, 아픔을 느낄 줄 모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도 웃을 줄 모르고, 움직이지 않고, 소리 내지도 않고, 자라지도 늙지도 않으면,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살아 있지 않은 것만 좇으려 하는 것 같아요. 늙지 않으려 하고, 좋은 것을 보고 쉽게 웃고 싫은 것을 보고 쉽게 찡그리지 않아야 멋진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여야 할 때에도 가만히 있으라 하고.
이 책을 다시 펼친 그날 밤, 딸깍하고 마음속에 불이 켜진 것 같았어요. 마지막 페이지를 보고 같이 웃을 수 있을 정도로요. 괴로운 것도 살아 있어 그런 것이구나, 하고요. 그리고 이 책을 선물한 사람과 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

그림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 편집자였을 때, 나는 멋지고 뭔가 있어 보이는 그림책만 좋은 그림책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함께 일했던 선배 편집자가  <코알라와 꽃>이라는 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을 때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은영 씨, 전 이 책이 참 좋아요."
"이 책이요? ……."
그 책의 그림은 하나도 멋있지 않았고 시시해 보였거든요. 하지만 그 말을 한 선배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난 그 말을 믿기로 했어요. 한번 읽어 보기로요.
아, 그때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싫어하는 사람이 추천했다면 나는 이 책을 절대 안 읽었을 텐데, 그럼 아직도 편견에 사로잡혀, 멋지고 으리으리한 그림책만 만들고 쓰려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코알라'와 '꽃'이라니,  제목마저 너무 귀여운 이 책에 대해서는 영영 몰랐겠지요. 




<코알라와 꽃>(메리 머피 글 그림, 한솔수북)



오소리와 너구리는 늘 자기가 언제나 옳다고 해요.
작은 잿빛 코알라는 자신 있게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대신 질문을 많이 한답니다.
가운데에서 '깜장일지도, 하양일지도' 하고 번민하는 작은 동물이 바로 주인공 코알라예요 :


코알라는 어느 날 산책길에 처음으로 꽃 한 송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꽃을 꺾어 유리병에 꽂아두었는데 그만 꽃은 시들어 죽어버리고 맙니다. 코알라는 슬퍼하지만 늘 자기 말만 맞다고 우기는 오소리와 너구리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지요. 그래서 코알라는 스스로 꽃을 다시 만들기로 결심하고 어딘가로 향합니다! 




바로 도서관으로요! 코알라는 스스로 책을 찾아 꽃을 피우는 법을 배우고 꽃씨를 심습니다. 오소리와 너구리는 뭘 했느냐고요? 그냥 비웃었을 뿐이에요.



코알라가 말해요. 
"내가 꽃을 피우다니……."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저는 코알라가 됩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격려하듯 코알라에게 속으로 속삭여요.
'잘했어, 코알라.'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말이 무조건 옳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코알라 같은 몽글몽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엔 더 많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으면 해요. 이 편지의 수신인인 당신도 어쩌면 코알라인가요? 기다리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드릴게요!



*

제 애인은 그림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림책을 읽어본 적도 없었을 거예요. 그냥 자기 애인이 만드는 책이 그림책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지요.

어느 날, 나는 <100만 번 산 고양이>를 이 남자에게 선물했습니다. 함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애인은 꽤 감동을 받은 눈치였어요.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 거예요. 어떻게 감동을 안 받겠어요? 심장이 돌멩이인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이 책을 읽어주면 눈물을 흘릴 거예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결혼을 했어요. 제 애인은 그림책은 잘 몰라도 헌책방은 아주 잘 아는 사람인데요,  어느 날, 헌책방에 다녀와서는 내게 책을 한 권 내밀더군요.
<100万回生きたねこ>, 바로 <100만 번 산 고양이>의 원서, 일본어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100만 번 산 고양이>를 함께 읽었어요. 다를 부분이 하나도 없을 것을 알면서도, 방금 사 온 원서와 한국어판을 비교하면서요.
지금 제 애인은 그림책을 좋아해요.  몇 년 뒤엔 아마 그림책 중독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저와 당신처럼.




백만 년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것이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임금님의 고양이였다가 죽고, 뱃사공의 고양이였다가 죽고, 도둑의 고양이였다가 죽습니다. 그렇게 죽고 다시 태어나면서 고양이는 죽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양이가 아닌 도둑고양이로 태어나자 고양이는 기뻤습니다. 자기 자신을 무척 좋아하게 된 것이죠. 



고양이와 하얀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를 많이 많이 낳았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할 정도였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하얀 고양이는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백만 번이나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 어린 시절 사노 요코가 떠오릅니다. 사노 요코는 중일전쟁 시기였던 1938년 일본군이 점령했던 베이징에서 태어나 일곱 살 무렵 수용소를 거쳐 일본으로 왔습니다. 전쟁으로 큰오빠와 동생들을 잃었고, 궁핍했던 일본의 사정도 있었기에 결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없어요. 엄마는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회고합니다. 그래서 어린 사노 요코는 아무리 맞아도 절대 울지 않는 아이, 온갖 집안일을 혼자 해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절대 울지 않고 죽는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 고양이가 꼭 어린 시절 사노 요코 같아서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세 권이 마음에 드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내일 저에게 다시 편지를 쓰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저는 완전히 다른 세 권의 그림책을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림책 중독자라면 좋아하는 그림책을 백 권 정도는 꼽을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좋아하는 그림책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다시 만난다면 꼭 소개해주세요.




이름 모를 독자님께

그림책 중독자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하며


최은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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