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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 Dec 22. 2016

그림책을 함께 읽은 어느 밤

그림책 에세이 #4




11월 어느 날,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선배로부터 메일이 왔다. 그림책 편지 독자이기도 한 그 선배는, 서점에서 운영하는 독서 모임에서 그림책 읽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고, 2시간 정도의 시간을 이끌어달라고 했다.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함께 읽을 책 목록을 보내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12월 20일 저녁 7시,  바로 어제 저녁이었다.

겨울은 밤이 빨리 온다. 함께 읽기로 한 책들과 시간이 나면 보여줘야겠다고 챙긴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고, 깜깜한 길을 조금 걷다가 버스를 타기로 했다. 걷다보니, 버스를 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걸었다. 네이버 지도에 의지한 채. 나는 길은 잘 못 찾지만 지도는 잘 보는 사람이고, 역시 그런 사람답게 시간에 맞춰 선배의 서점 '한뼘 책방'에 잘 도착했다. 독서 모임의 두 사람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 셋은 똑같이 따뜻한 모과차를 시켰다. 나는 왠지 기분이 무척 좋았는데, 아마 그 서점이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했고, 선배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모과차도 내가 좋아하는 차였으며, 내가 좋아하는 책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읽는다는 것도 좋았던 것 같다. 그런 밤이,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연말이라, 시간, 세월, 나이듦의 대해 같이 얘기해볼 수 있는 그림책들을 꼽아주면 좋겠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내가 선택한 그림책 세 권이다. <100만 번 산 고양이> <우리 할아버지> <마르게리트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우리는 한 페이지씩 돌아가며 소리 내서 그림책을 읽었다. 소리내어 책을 읽는 자신의 목소리에 긴장하는 사람도, 그림책에 빈번하게 나오는 의성어와 의태어에 쑥쓰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림책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혼자 가만히 읽어도 좋지만, 여럿이 읽을 때는 역시 소리내어 읽는 것이 좋다, 그림책은.


<100만 번 산 고양이>. 이 이야기를 읽고 어떤 느낌을 받든 그건 독자의 자유다. 죽음과 삶에 대한 성찰,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지만, 사노 요코의 인생을 알고 나면 이 고양이가 사노 요코 자신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사노 요코는 중일전쟁 시기였던 1938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일본 패전 후 일곱 살 무렵 수용소를 거쳐 일본으로 왔다. 일곱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큰 오빠와 두 동생을 전쟁 전후로 잃고 장녀가 되었다. 어린 사노 요코는 행복하지 못했는데, 어머니의 폭행과 폭언, 잇따른 형제들의 죽음 그리고 전후 피폐해진 일본의 경제 등 모든 상황이 불행의 이유였다. 그래서 아무리 맞아도 절대 울지 않는 아이, 엄마의 따뜻한 손을 한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아이, 온갖 집안일을 다 하면서도 불평하거나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이 어린 시절이, 그의 에세이 <시즈코 상>에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는 오빠 대신 내가 죽었으면 좋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놀다 들어가면 어머니는 다짜고짜 내 옷을 붙잡고 “너 어디서 놀다 온 거야? 응?” 다그치며 나를 기둥으로 몰고 가서 내 머리를 쿵쿵 찍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울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딱 한 번, 물을 길어 온 내게 어머니가 토마토를 쥐여준 적이 있다. 그때의 기쁨과 토마토의 빨간 빛깔은 결코 잊을 수 없다. 마음속에는 밝은 토마토 불빛이 켜졌다.……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내게 했던 일을 일러바치지 않았지만 언젠가 주말마다 돌아오는 아버지가 내 일로 어머니와 말싸움을 벌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뒷마당의 빨랫대를 붙잡고 울었다. 그 눈물이 어떤 의미의 눈물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절대 울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려 하고, 상처받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며 저만치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보려는 아이의 모습에, 죽는 것 따위 아무렇지 않다고 하며 100만 번 죽고 100만 번 다시 살아난 고양이가 겹쳐서 떠오른다. 그런 어린 아이였던 사노 요코가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묵묵히 살아냈던 것처럼, 고양이도 다른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자기 자신만의 고양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사랑하고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 다른 고양이를 자신보다 더욱 사랑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죽음이었다.

'여한이 없는' 삶.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 그런 느낌을 받는다면 좋겠다. 그야말로 잘 살아온 인생일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는 가정조차 필요치 않은. 사노 요코의 인생 이야기를 더 많은 그림책과 풀어낼 시간이 있다면 좋겠다. 하루가 지나도 모자랄 텐데.



<마르게리트 할머니의 크리스마스>를 읽으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우리가 아는 노인들, 우리 주변의 노인들 이야기였고 앞으로 맞이할 우리 노년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미 늙어가고 있지만, 더욱 늙어버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이다지도 슬프다. 게다가 우리의 현실은 마르게리트 할머니가 살고 있는 캐나다처럼 평화롭지도 안정적이지도 못 하다.

그래도 우리는, 마르게리트 할머니의 외출에 집중했다. 크리스마스에 들이닥친 불청객들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는 데 성공했는지 아닌지를, 그리고 차를 주었든 주지 않았든 별로 중요치 않다는 얘기를 했고,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온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데에 다다랐다. 나는 그냥 "뭘까요? " "왜 그랬을까요?"라고만 했지만 이렇게 이야기의 핵심에 잘 다가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이 책은 마지막을 위해 잘 짜여진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 텍스트는 할머니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노인들이 대부분 두려워하는 일들이다, 넘어져서 다치고,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고, 공연히 구설수에 오를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하는 등), 무엇을 하며 하루하루 보내는지(역시 혼자 사는 노인들의 삶과 비슷하다, 텔레비전을 보고, 멀리 사는 자식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할머니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일러스트레이션은 할머니의 공간인 집을 강한 빛으로 비추며 집과 집밖의 공간을 빛과 어둠, 편안한 곳과 공포스러운 곳, 안전한 곳과 불안한 곳으로 대비시킨다. 하지만 결국 할머니는 빛을 등지고 어둠의 공간인 집 밖으로 나온다.

잠시 집 밖으로 나오는 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앞의 이야기를 통해 마르게리트 할머니가 다양한 이유들로 집 밖으로 좀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독자는 이 의외의 사건에 집중하게 되고 대단한 사건처럼 느끼게 된다. 할머니가 집 밖으로 나와 바깥 공기를 쐬고, 길에 쌓인 눈을 밟으며 어둠속을 걸어갈 때, 텍스트는 짧아지고 일러스트레이션은 눈의 촉감과 눈을 밟을 때의 소리, 바깥 공기의 신선함과 차가움, 그리고 짙은 어둠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는데, 그야말로 그림책만이 할 수 있는 전달 방식이다.



<우리 할아버지>를 읽고, 함께 가져간 <할아버지의 붉은 뺨>을 또 읽었다. <존 버닝햄 나의 그림책 이야기>에는 <우리 할아버지>에 대한 글이 짤막하게 실려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나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내 딸 에밀리와 아버지의 모습을 관찰하여 조합한 것이다. 대부분의 글은 에밀리와 아버지가 나눈 대화를 엿듣고서 썼다.


실제로 노인과 아이는 생각이 다르고, 서로 공감한다기보다는 한쪽(주로 노인)이 다른 쪽(주로 아이)의 생각을 듣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때가 더 많다. 심지어는 그것도 힘이 들어 서로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현실적인 시선이 담겨 있어 억지로 감동을 강요하지 않아 좋은 책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이와 노인이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모습이 유머러스하게 담겨 있다. 서로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인정하게 되는 것. 그리고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했기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는 것. 그 기억이 살아갈 힘을 주는 것. 중요한 건 이런 것이다.





 <할아버지의 붉은 뺨>은 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세계 최고의 구라쟁이 할아버지를 둔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가감없이 들려준다. 할아버지는 숲 속을 거닐다 날개를 발견해 날아보기도 하고, 전쟁 중에 집에 가고 싶어서 낙하산에서 그냥 뛰어내렸더니 바로 집 앞에 놓인 의자로 내려앉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는 말투에서, 아이도 이미 그 이야기가 반쯤 사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다. 읽고 있으면, 아이에게 자신의 인생을 온갖 환상을 섞어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상상된다. 전쟁도 이별도 겪으며 굴곡이 많았을 삶을 유머와 환상으로 반추하는 노인의 마음.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 이 두 마음이 앙상블을 이루어 설명하기 힘든 감동으로 이끄는 책이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멋진 헌사도 적혀 있다.


"현실에 저항하고 판타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

크리스마스에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들 한다. 우리는 보통 기적을 커다란 사건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사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일 수 있다. 

사는 게 뭔지, 그러다 문득 우연한 일에 가슴이 뛸 때. 늘상 우울하고 재미없다가 아주 가끔 기분이 좋을 때. 그런데 그 우연한 일은 타인이 보기에는 별일 아닐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 자신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 나만 아는 '작은 기적'이다. 마르게리트 할머니가 어쩌다 집 밖으로 나와 달빛을 마주했듯이. 그런 작은 기적들이 쌓여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고 삶을 긍정하게 된다.

우리는 9시까지만 책을 읽기로 했지만, 마지막 책을 덮고 나니 9시 반이 지나 있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서점의 문을 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궁금했다. 오늘 밤, 그들에게 작은 기적이 일어났을까? 하고. 나는 최근에 작은 기적을 겪었는데 여기에 남기고 싶다. 남이 보면 "이게 뭐야?" 할 테지만. 


난 이 노래를 어쩌다 알게 됐고 무척 행복했는데, 그 뒤로 내 일상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 변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Ēriks Ešenvalds - O Salutaris Hostia>

https://www.youtube.com/watch?v=blUTC7zzz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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