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YUNIQUE Sep 17. 2021

나 좀 열심히 살았네?








'눈부시게 쨍쨍했던 여름이 지나고 벌써 9월이 왔다'라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번개같이 9월의 중순에 접어들었다.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가는지. 유난히 눈코 틀새 없이 바쁘게 몰아친 이번 여름이었기에 더욱더 빨리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8월 말, 밴쿠버에서 운전으로 약 8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 '넬슨'에서 치러지는 결혼식에 초대받아 본의 아닌 휴가를 쓰게 됐다. 휴가를 다녀오고 나니 갑자기 그 바쁘던 생활이 마법같이 증발되고 몸에 배어 있던 생활 '모멘텀'이 사라져 버려 약간 허무하고 울적하게 9월의 2주를 보내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개학 시즌이 3월이기 때문에 다들 같이 나이를 먹는 1월, 그리고 방학 후 학교에 입학하는 3월이 굉장히 중요하다면, 이곳 캐나다에서는 9월이 한국의 3월과 비슷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여름에 휴가를 가고, 9월이 되면 많은 이들이 새로운 직업을 구하거나 학교에 입학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마치 한 해가 새로 시작되는 기분을 심심치 않게 느껴왔던 9월의 시작은 뭔가 새로운 일이 잔뜩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휴가를 다녀오고 나서 일이 몰려들지 않자 내 머릿속은 불안감으로 잠식당해버렸다. 밴쿠버에서 프리랜서이자 1인 사업자로 생활하고 있는 나는, 미리 정해진 일이 없으면 마음과 몸, 정신, 머리 전체가 안개가 낀 듯 흐트러진다. 내 생활 반경은 지극히 '프로젝트'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맡은 프로젝트가 없을 때는 정신줄을 놓고 그저 침대와 하나가 되어 늘어져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일이 좀 줄어들었을 때 브런치에 글을 쓰거나, 아직도 한참 배워야 할 '프로크리에이트'나 '일러스트레이터' 등을 마스터하면 좋을 텐데. 한국에서 어렵사리 받은 책들도 좀 읽고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참 피곤한 일이다. 2020년의 목표였던 '마음 챙김'은 다 어디로 챙겨 먹은 것인지, 나는 또다시 자기 비하와 비난의 굴레 안으로 또르르 흘러들어오고야 말았다. 이민을 오고 나서 가장 나를 괴롭혔던 것은 '영어'였다. 많은 이민자들이 힘들어하는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나의 기준은 이민자가 아닌 "웰 아유 프롬?"이라는 질문을 듣지 않는 캐나다 사람 같은 영어를 쓰고 싶은 욕심과 야망으로 불타올라 있었기 때문에, 뭔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말하고 싶은 단어를 나중에 생각하거나, 버벅거리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을 굉장히 심각하게 질책하고는 했다.



사실 처음 캐나다에 왔을 때는 3~5년 정도 꾸준히 이 나라에 엉덩이 붙이고 살면 영어를 마스터하겠구나 하는 기고만장하고 원대한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민을 오고 난 후 8, 9년이 지나도 이 히스테리는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았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유초중고 등 및 대학교를 한국에서 나왔고, 특별하지도 않은 정규 과정의 공립학교를 졸업했으며,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던 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갑자기 캐나다에 왔다고 캐나다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주류 사회에 진입하려고 발버둥을 쳐 온 것이다.



그렇게 이민을 온 지 10년이 지난 2020년. 드디어 '마음 챙김'과 명상, 요가 등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나 자신에게 가혹했었는지, 내가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가 얼마나 달성하기 힘든 목표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영어'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되자,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더 생겨났다.



어저껜가. 브런치에서 60일 동안 글을 안 썼다고 보고 싶다는 알림을 보내왔다. 구차하게 매달리는 전 연인 같은 느낌이었지만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브런치 북에 공모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그냥 편하게, 쉽게,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을 적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브런치의 프로필에 있는 경력 및 이력을 업데이트하며 내가 이때까지 살아온 삶의 흔적을 뒤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2021 Applied Arts Awards: Advertising Photography Winner


2020 Certified by Specialty Coffee Association in North America


2019 Best Dressed List Finalist in Vancouver Magazine


2015-2017 Nordstrom SPACE Ambassador in Vancouver


2015 Versace x Vogue Magazine Grand Opening Party Co-Host


2014 Instagram Suggested User



이 정도만 간략하게 썼는데도, 나 참 열심히 잘 살아왔다는 게, 가족 친구 없이 혼자 이민 와서 열심히 잘 버텨줬다는 게. 나 자신에게 고맙고 혹독하게 몰아붙여서 미안하다는 마음이 든다. 나는 왜 잘 쉬지를 못할까. '쉼'을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간주하고, 나에게 숨 쉴 공간 조차 허용해오지 않았던 나는 여전히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강박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2022년에는 좀 잘 쉬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리고 쉴 때마다 나 자신에게 말해줘야지. "조금 쉬어가도 괜찮아.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으니까"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젠장, 열심히 살아도 우울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