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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혜 May 29. 2020

참으로 뜨거운 아지랑이가 일렁이네요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세이 #8 도전한다는 것



바이칼호수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바이칼호수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알혼섬과 리스트비얀카로 찾아간다. 두 곳은 바이칼호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닮았지만 그곳에 도달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의 차이가 있었다. 알혼섬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르쿠츠크에서 미니밴을 타고 족히 여섯 시간에서 일곱 시간은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알혼섬 내에서 섬을 관광하는 일도 그곳에서 하루 이상은 숙박을 꼭 해야 소화할 수 있는 일정이었다. 결국, 우리는 한 시간 반 정도 가면 바이칼호수를 볼 수 있는 리스트비얀카로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다시 겹겹의 옷들로 몸을 붕대처럼 꽁꽁 싸맸다. 챙겨놓은 캐리어와 짐들은 숙소의 데스크에 맡겨두었다. 우리는 리스트비얀카로 가는 미니밴을 타기 위해 이르쿠츠크의 중앙시장으로 이동했다. 중앙시장은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숙소에서는 걸어서 십 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다. 길을 좀 걸어 들어가니 차들이 일렬로 모여 서 있는 자리가 나타났다. 나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리스트비얀카?”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올라타라고 했다. 그 차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고, 남은 두 자리에 사촌 동생과 내가 자리 잡고 앉자, 기사 아저씨도 차에 올라탔다.

 



리스트비얀카로 가는 길은 심하게 거칠었다. 몸이 붕 떴고, 연신 방지턱을 넘는 길을 달리는 것만 같았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건 그 방지턱 같은 언덕이 나타나도 절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차를 내모는 것이었다. 급속도로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안에 장기와 위액까지도 소용돌이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속에서 참으로 뜨거운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정말 여간 고통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유리창 밖으로는 자작나무 가득한 새로운 설원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난 이러한 것을 담아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순간 바이칼호수를 보러 가지 말아야 했을까 하는 후회까지 속 안에서 몇 번이고 소용돌이쳤다. 그렇지만 일단 지금을 견뎌내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지금 당장 눈앞의 세계보다 더 새로운 세계를 아낌없이 마주할 수 있다는 건 확실한 사실임이 틀림없었으니까.


초등학생, 그때는 내 안에 큰 울렁거림이 꿈틀거리던 시절이었다. 난 많이 내성적인 아이였다. 이러한 성격은 일반적인 발표 수업 때도 여실 없이 드러났는데, 그때 나의 담임선생님은 발표한다는 것에 대해서 크고 큰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분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난 발표를 선뜻 나서서 하지 않는 아이로 낙인 되어 있었다. 그때 가장 의문이었던 건 왜 하필 나인 건지. 나 말고도 발표를 하지 않는 아이들이 우리 반에 이렇게나 많은데. 왜 혼나는 대상 그 중심에는 내가 가장 선두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아무리 백만큼의 숙제를 잘해와도 발표를 하지 않으면 그건 구십은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를 지탱하던 마음 한구석의 보호막이 청천벽력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발표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모든 학교생활에 소홀하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 날 밖으로는 아무 말을 못 했지만, 내 맘속으론 엄청난 부끄러움과 좌절감, 더불어 모욕감 같은 것들까지 밀려왔다. 그때 난 열 살이었다.


난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처음으로 발표했던 숙제는 북한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보자는 것이었고, 편지를 써야 하는 것은 필수였으나 수업시간에 그 편지를 발표하는 것은 자유였다. 선생님은 여느 때처럼 발표할 사람이 누가 있는지 물었는데, 나는 기다렸다는 듯 번쩍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전후 사방으로 아이들이 숙덕이는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그 이야기의 중심은 발표를 하기 위해 '내가 손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든 다른 친구들보다 내게 앞에 나와 발표할 기회를 내주었다. 전날 밤, 내가 쓴 편지를 외우기 위해 밤새 읽고 읽었던 기억을 떠올려 사십 명이 넘는 반 아이들의 앞에서 처음으로 발표라는 것을 했다. 나는 그날 내 속에서의 울렁임을 연신 다독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었다. 수도 없이 버벅거렸을 것이고, 내 이야기를 듣는 모두를 신경 쓸 여력은 안 됐기에 맨 끝에 휑한 벽만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로 난 무슨 성공신화라도 거친 것처럼, 선생님의 모든 칭찬을 받는 선두대가 되어있었다. 그 학기를 마치기까지 가장 많은 칭찬을 받았으며, 또 발표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면 난 누군가가 혼날 때, 얘처럼 해야 한다는 비교 대상이 되어있었다.


결론은 좋았지만, 무언가를 이루고 해낸다는 것에 있어 이러한 상황의 순서를 꼭 거쳐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것은 상처와 자존심에서 비롯한 나의 꿈틀거림이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그 전의 상처가 사라지고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난 칭찬을 받았고, 그건 썩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날 가장 힘들게 만들던 멀미와 같던 약점들은 어느새 나의 가장 큰 강점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난 아직도 무언가를 소리 내 말한다는 것엔 부담을 갖고 있다. 취업을 위해 면접을 보았을 때,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 발표를 할 때, 그 시절 영웅담의 주인공이었던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가 많으며, 수도 없이 쩔쩔매고, 수도 없는 말들을 더듬곤 했다. 예측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으며, 학교라는 울타리에서는 연습이면 충분했던 것이 회사라는 곳에서는 눈치보지 않고 주눅들지 않아야 된다는 요소까지 추가해야 완벽해졌다. 사회생활에서는 정말 이를 악물고 대담해져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칭찬이라는 것이었다.


현실에서, 하지 않고 비껴가거나 지나쳐갔으면 싶은 순간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무수하게도 자주 찾아온다. 여전히 지금의 난, 어릴 적 그때를 닮은 순간들이 또 나타나면, 한참을 한숨을 쉬었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꾸역꾸역 일을 해내곤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잘했으면,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할 수 있는 만큼 더 해보고 싶다 생각하고, 해야 한다 다독인다.


이 뜨거운 아지랑이를 참고 버텨낼 수 있다면, 전혀 상상치 못했던, 느끼지 못했던 세계가 다시 도래할 것이었다. 그것은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신에게도 앞으로 자주, 이런 아지랑이가 찾아오겠지만, 당신은 그 순간을 무사히 잘 넘겨 갈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던 미니밴은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다시 힘껏, 문이 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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