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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혜 Jun 02. 2020

갓 블레스 유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세이 #9


리스트비얀카에는 차가 지나다니는 길을 제외하고는, 집 근처와 상점 주변들 사이로 종아리까지 전부 뒤덮을 눈이 쌓여있었다. 살 끝을 에는 날카로운 바람들이 연신 온몸 구석구석을 비집고 들어왔다. 겹겹으로 입은 충분히 빳빳한 옷들도 그 날은 헤진 천 조각처럼 힘이 없었다. 바이칼호수를 바라보기에는 그 모든 것이 매혹적이었지만, 겨울의 혹독한 날씨는 미처 손쓸 세도 없이 체력을 바닥나게 만들었다. 광활한 호수를 품고 있는 이 곳에서는 더 거센 바람들이 곳곳에 칼자국을 내는 것 같았고, 높이 쌓여버린 눈에 한 발자국씩 걷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몸통은 괜찮다 해도, 얼굴과 손을 덮치는 바람의 조각들을 버티기는 힘이 들었다.

그렇게 간신히 한발 한발 떼고 있던 중, 파랗고 노란 눈 색깔을 지니고 있던 몸집이 큰 시베리안 허스키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보이는 ‘coffee’라고 쓰여있는 카페와 한 식구 같았다. 우린 황급히 그 작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날의 마을은 온통 조용했다. 우리가 딛고 있던 그곳에 우리 말고 다른 여행객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간 그 카페에도 우리가 첫 손님인 것 같았다. 카페 안에는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계셨고, 할머니는 가게 안의 바닥을 기다란 걸레로 닦고 계셨다. 깨끗해진 바닥 위로 눈길에서 한참을 질척인 내 운동화를 올려놓는 것이 잠시 망설여졌다.


이에 조심스레 가게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사촌동생과 나는 한쪽 자그만 테이블 위해 짐들을 풀어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할머니께서 한 손에 들려있던 걸레를 바닥에 탕탕 치며 내뱉는,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속사포로 공중에 흩어졌다. 난 너무 깜짝 놀라, 아까의 망설임이 혹시 내가 몰랐던 이곳의 예절을 방해한 것이 아닌가 싶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놀란 표정으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곤 호탕하게 웃으면서, 손을 휘휘 저어 보이셨다. 사촌동생이 해석하길 ‘바닥을 다 닦아 놓았는데 이제야 들어오다니’라는 뉘앙스로, 대충 그분만의 장난인 것 같다고 했다. 아, 큰일 난 것이 아니었구나. 안도의 긴 숨을 내쉬고 할머님을 쳐다보며 웃어 보였더니, 할머님도 그에 대한 답변으로 호탕한 웃음을 다시 한껏 지어 보이셨다.


테이블 위에는 메뉴판이 놓여있었다. 사촌동생과 나는 그곳에서 가장 따뜻해 보이는, 아니 가장 뜨거워 보이는 라떼 한 잔씩을 주문했다.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아 몇 개의 각설탕이 함께 올려진 라떼 두 잔이 나왔다. 꽁꽁 얼어있던 내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갈 단 것이 필요했다. 그 라떼속으로 각설탕 두 개를 집어 담가 녹여내었다. 고루고루 휘저어 한 모금을 마셨더니, 이제야 살겠다는 기분으로 정신이 말짱해지고, 눈꺼풀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아직 남아있던 바이칼호수의 일정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리스트비얀카에는 체르스키 전망대가 있으며, 높은 곳에서 넓은 바이칼호수를 한눈에 품고 바라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이곳까지는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야 했는데, 과연 이런 폭설에 무사히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는 그 카페에 계신 아주머니께, 전망대에 가기 위한 리프트가 운행하는 지를 여쭈어보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역시 오늘은 운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 전망대를 가고 싶다면 아주머니는 택시를 불러줄 수 있다고 말씀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빠졌다. 만약, 택시를 타고 이곳에서 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눈은 여전히 계속 내리고 있고, 그곳에는 얼마나 더 많은 눈이 쌓여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도착한다 해도, 다시 돌아오는 것도 문제였다.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무언가 지는 기분을 들게 하기도 했지만, 그날은 좀 더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우리는 몇 시간 뒤에 또다시 모스크바로 가기 위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야 했고, 혹시나 이곳에서 다시 되돌아가는데 시간을 소모해 그 열차를 놓치면 안 될 일이었다.

 

사촌동생과 나는 다시 미니밴을 타고 처음의 시장으로 돌아가자고 결정을 내렸다. 남는 시간 동안에 시장을 모습들을 여유롭게 눈에 담고 느긋하게 보는 것도 꽤 근사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으로 분주했던 나의 머릿속과 몸이 한껏 차분해졌다. 곧 찻잔의 반도 채 남지 않은 라떼를 남김없이 모조리 비워내고는 다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사촌동생과 나는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일 수 있던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할머니와 아주머니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웃음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갓 블레스 유!”


그 날 우리는 러시아의 가장 하얗고 가장 조용한 마을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가장 따스한 선율의 행운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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