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이혜 Jun 02. 2020

무지개도 이처럼 상큼할까요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세이 #10


다시 이르쿠츠크로 돌아왔다. 이르쿠츠크 중앙시장에는 형형색색으로 쌓인 과일들을 팔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깔과 탑처럼 쌓아 진열되어있는 모습에 홀려, 지나갈 때마다 자꾸 눈길이 갔다. 또, 그것들은 평소 우리가 알고 있는 과일들과 비슷한 모습을 갖고 있었지만, 간혹 마치 복조리 같이 생긴 처음 보는 형색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열차에서 만난 러시아 친구에게 물어보고 난 뒤,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그랗고 원형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러시아에서 만났던 과일들은 비슷한 듯 다르기도 했지만, 꽤 그렇게 정갈한 모습들로 차곡차곡 놓여있었다.


한 번은, 한 손에 들어갈 것 같이 동그랗고 앙증맞은 크기의 사과였는데, 열차 안의 몇몇 무리 사람들이 그 사과를 한 손에 쥐고 왔다 갔다 하며 연신 베어 물고 있었다. 그것도 정말 짙고 진한 빨강을 갖고 있기에 꼭 동화 속에서만 보았던 독을 품고 있을 것 같은 사과인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독은 품고 있진 않았지만 크게 한 움큼 베어 무는 것을 보면, 열차 안에서의 일들을 마치 동화 속 이야기로 빠져들게 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에도 마땅했다. 그리고 나도 그 모습에 홀려 사과 한 개를 사 먹었는데, 그들이 먹는 것과 꼭 닮은 것을 나도 함께 먹는다는 것이 무언의 동질감과 같은 것을 들게 했다.


또 한 번은, 열차에서 중간에 정차하던 역에서 내려 상점에서 귤 한 보따리를 사서 먹었고, 그것은 꽤나 달고 새콤한 맛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열차에서 라면과 같은 즉석식품을 챙겨 먹던 우리들에겐 꽤 큰 값어치를 느끼게 할 간식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 귤이 우리의 자리에 놓여있을 때 그것을 보고 갑자기 러시아 군인친구가 말을 걸어오며 한 개 먹어도 되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아끼는 것이었지만 거절하기엔 야박하기에 먹으라고 흔쾌히 준 적이 있었다. 이처럼 과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구실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떠올려보면,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참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대학생 때였다. 교양수업을 들으며 친해진 중국 유학생 언니가 있었다. 중국어 강의에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나누라며 교수님은 정말 중국인 학생과 함께 수업을 듣게 해 주던 것이다. 수업 첫날, 나는 우연히 그 언니와 가까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언니가 내밀어 보여준 우리나라의 모습이 담긴 엽서를 보며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이후로도 같이 옆자리에 짝꿍처럼 앉게 되었다. 혼자 듣던 교양수업에서 내가 가장 친해질 수 있던 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


하루는, 언니를 우리 집에 초대했고, 난 대충의 우리 집 위치와 동네에 도착하는 버스의 번호를 알려주고 난 뒤, 그 버스가 도착하는 지점의 정류장에서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의 버스가 도착했고, 문이 열리자 뒷편에서 내리는 언니가 보였다. 그리고 그 손에는 꽤 크고 무게가 나갈 것 같은 동그란 수박 한 통이 들려있었다. 버스를 타고도 족히 열 정거장 넘게 걸리는 거리를, 언니는 묵직한 수박 한 통을 손에 들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의 집에 갈 때, 이러한 것을 사 가지고 가는 것이 예의라고 들었어.”


언니가 나를 보며 해준 말이었다.

언니가 갖고 온 것은 수박 한 통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은 한 움큼 베어 문다고 해도 사라지고 사라지질 않을 붉디붉은 애틋한 정이었다.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마치 귤 하나를 까서 꼭꼭 씹어먹는 일과도 같다. 그리고 사과 하나를 깎아서 아삭 씹어먹는 일과도 같다. 커다란 수박 한 조각을 들고 와작 베어 무는 일과도 같다. 그렇게 과일 한 개씩을 먹을 때마다, 당신과 나의 머리 위엔 그 빛깔을 닮은 무지개가 한 줄기씩 떴을 것이다. 그런 날이면, 나도 당신의 입안에 한 가득 침이 고이며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해 줄, 그런 과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자라났다.


한국에서는 과일을 나눌 일은 자주 없었는데,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과 과일을 아삭아삭 씹으며 함께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행복해졌다. 이곳에서는 내가 그들에게 과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귤과 오렌지처럼 시고 강력하진 않더라도, 사과와 체리 정도로 단맛은 돌게 했을 만한 그런 사람으로는 남았기를, 이렇게 작게나마 다시 한번 소망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갓 블레스 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