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이혜 May 20. 2020

만남과 설렘, 이별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곳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세이 #2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타게 된 열차는 007번의 6번 칸이었다.


한국에서 미리 열차 예매를 할 때 열차번호가 빠를수록 열차가 신식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001번에 가까울수록 신식 열차, 그리고 뒤로 갈수록 좀 더 노후된 열차라는 것. 그렇지만 때에 따라 꼭 번호에만 의지할 것은 아니니 본인의 여행 일정에 맞게 잘 살펴보고 예매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내가 예매를 하게 된 열차는 모스크바까지 가기 빠듯한 9박 10일의 여행 일정을 맞추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당일, 이르쿠츠크로 바로 출발할 수 있는 밤 기차였다. 여행 일정 중 한 가지를 말해보자면, 사촌 동생과 나는 이르쿠츠크에서 내려 바이칼 호수를 보고 다시 모스크바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선택의 기로는 딱히 없었고 주어진 시간에 맞게 우리의 발걸음을 독촉시킬 수 있는 열차의 번호가 007번이었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기차역은 초행자, 그리고 외국인들에겐 쉬운 길은 아니었다. 기차를 타러 가기까지 몇 개의 통로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야만 비로소 기차를 탈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은 마트에서 산 오백 밀리 생수 한 통을 거의 비워냈던 것 같다. 그곳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처음이었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눈에 단단히 힘을 주어야 하는 깜깜한 밤이었고,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한 터였다.


출발시각은 저녁 10시 45분. 그보다 사십 분은 먼저 우리가 타야 할 기차가 도착했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드디어 눈앞에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감탄할 새도 없이, 사촌 동생과 나는 서둘러 6번 칸을 찾아 캐리어를 들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가 지내야 할 열차 칸과 좌석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단 짐을 옆에 두고 자리에 앉고 나니 열차 안의 정체 모를 꿉꿉한 냄새들이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지체 없는 냄새의 습격에 이제 진짜 횡단열차를 탔다는 나지막한 깨달음이 들게 했다.


열차는 이제 우리가 삼일 동안은 지내게 될 보금자리였다. 그곳에 각자의 캐리어와 배낭, 부피가 큰 외투들을 어떻게 잘 보관하는지가 제일 관건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자리는 삼등석으로, 복도식 좌석이었다. 이 자리는 삼등석의 다른 좌석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잠을 자기 위해서 테이블을 펼쳐야 침대가 되는, 밥을 먹기 위해서는 펼쳐져 있는 테이블을 다시 접어야 하는 수고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내가 예매를 할 때는 이 복도식 자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좋은 자리를 위해서는 무조건 빠른 예매가 답인데, 늦장을 부린 탓이었다. 불편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래도 소중하게 얻어낸 좌석임은 틀림없었다.


그 좁은 곳에 모든 짐을 바로 차곡차곡 정리하기에는 한국에서 러시아에 도착한 첫날밤이었고, 열차에 타기까지 추위와 사투를 벌였으니, 눈앞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천 피스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만큼 진을 뺄 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당장 그만큼의 집중력을 요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를 막지 않게 위아래로 우리의 여행용 가방들을 욱여넣는 순발력, 그리고 일단 몸과 마음의 심신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차분한 인내력.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 날, 블라디보스토크의 밤 기차에는 많은 사람이 탔다. 우리의 맞은편에는 아주머니, 그리고 한 청년이 탔는데, 아주머니는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다시 본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일행들은 아주머니의 곁에서 열차가 출발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열차가 떠날 무렵 다시 내려서는 창 밖에서 열차가 출발하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헤어짐을 마주하는 표정과 모습은 마치 하루의 시간이 아침에서 저녁으로 당연히 흘러가는 것처럼, 어느 이별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설레는데, 저 아주머니는 가족들과의 이별에 아쉬운 마음이 가장 크겠지’


괜히 내 맘이 더 아쉬워 아주머니에게 눈길이 머물렀다. 그렇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감정을 지레짐작하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 이내 눈길을 다시 거두었다.

횡단열차에서 내가 처음으로 엿본 모습은 이별이었다는 것. 이 곳은 만남과 설렘, 그리고 이별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곳이었단 걸.


드디어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좁은 칸에 빼곡히 들어찬 열차 안의 사람들은 그렇게 비밀스러운 혼자만의 감정들을 연신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2019년 겨울,

열흘 동안의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기를 담은 에세이가 계속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롤로그, 커다란 사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