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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혜 May 20. 2020

설국열차의 냉정과 열정사이 #2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세이 #4



#2 냉정하나


첫 시베리아의 횡단 열차 여정도 내일 밤 이르쿠츠크에 도착하면 모스크바에 가기 전까지 잠시 쉬게 된다. 사촌 동생과 나는 첫 열차에서 마지막 밤이니 식당칸에서 맥주 한잔하며 마무리하자고 했다. 식당칸은 우리가 지내는 칸에서 꽤 걸어가야 했다. 네 칸에서 다섯 칸 정도를 설국열차처럼 꽁꽁 언 영하의 열차 사이를 넘어 걸어갔고, 그제야 식당은 열차의 꼬리 칸처럼 모습을 드러내었다.


식당칸은 한번 왔던 적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이번에는 술을 거하게 마시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잠시 술에 취해 그들만의 흥이 오른 것이라 추측했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며 두리번거리다, 우린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맥주와 포테이토, 머쉬룸이 적혀있는 대략적인 음식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간단한 안줏거리들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같은 열차 칸에서 한번 말을 걸어왔던 파란색 티의 남자가 보였고 우리에게 또다시 인사를 했다. 그 남자는 다소 마른 체격이었지만 그 몸집에 비해 왜소해 보이진 않는 체구를 갖고 있었다. 낮에 갑자기 사촌 동생과 내가 있는 자리로 와서 인상을 찌푸리며 본인의 허리를 두드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는데, 무언가 그 고통은 나의 연민을 호소시킬 수 있는 인상이 아닌지라 그냥 지나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포함한 테이블의 일행들은 갑자기 번갈아 가며 한 명씩 우리 자리로 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계속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식당칸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파란색 티의 남자는 들어보니 카자흐스탄 사람이라는 것 같았다. 그들 중 유일한 서양인이었던 또 다른 한 명은 영어로 ‘왓츄얼 네임’ 이란 말로 소리를 높이고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사람의 본능적인 느낌으로 뭔가 편치 않은 상황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갤 두리번거리니 그 일행 중에 한 명은 그들의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으려는 식당칸 직원의 엉덩이 위로 손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연신 열차 칸을 왔다 갔다 했는데, 우리에게 갑자기 코카인을 함께 피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경우가 처음이라 너무 당황스러웠고, 눈동자를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그들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기분이 점점 불쾌해졌고, 설렜던 첫 열차에서의 마지막 날을 망가뜨리는 것만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우리의 시간을 일방적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그 파란색 티의 남자는 다시 우리 테이블로 와 악수를 하자는 투로 내 코앞 가까이 손을 들이밀었고, 난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 이후에 어떤 거대한 사태가 발생할지 겁이 났지만, 다행히 그 사람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본인의 자리 돌아갔다. 제발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빌면서.


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영어를 할 수 있는 러시아 여성이 우리에게 나지막이 저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뉘앙스에 얘기를 건네주었다. 서둘러 대충 그 자리를 마무리하고 돌아가려는데, 그들 중 또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고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사촌 동생의 입에서 혼잣말보다는 높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겟 아웃!!!”


그 남자는 이 말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꽤 큰 덩치와 복부를 가졌으며, 빡빡 밀은 민머리를 하고 있던 그 사람은 주먹으로 눈앞의 테이블을 쾅쾅 내려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마셨던 맥주 캔과 유리컵에선 건배하는 소리보다 더 큰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일으켜 다른 칸을 가기 위해 문을 잡아당겼다.


‘꼬레아!! 꼬레아!!’


그렇게 고래고래 질러대는 소리가 뒤통수 너머로 식당칸을 빠져나올 때까지 계속됐다.


다시 열차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 열 시가 지나고 난 뒤였다. 열차는 이미 소등이 됐고, 우리 자리에는 희미한 주황빛만이 가득했다. 앞으로의 남은 여행에서 더 이상의 식당칸을 없을 것이었다. 난 서둘러 잠을 청하기 위해 2층 자리로 올라갔고, 그 구석의 좁은 자리에서 내 턱 끝까지 담요를 끌어올리고 동그랗게 말린 등을 돌려 누웠다. 마치 누군가의 유희를 위해 한껏 그 바늘에 걸려 어딘가에 한참을 푹 담가진, 생채기가 난 지렁이의 움직임이었다. 다행히 잡아 먹히기 전에 물 밖으로 꺼내졌다.


난 살아는 났지만 그 밤은 러시아 여행 중, 내 맘속에 가장 큰 냉정을 밖으로 떨궈버린 날이었다.



2019년 겨울,

열흘 동안의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기를 담은 에세이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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