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특별한 여행지 (2), 2016년 9월
경남 하동군 북천면은 작고 아담한 마을이었다. 경전선 기차가 서는 북천역이 있고 가을에는 코스모스 축제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림 이병주 선생의 소설 ‘지리산’을 읽고, 이병주문학관에 한번쯤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들르게 되었다.
문학관은 북천면에서도 더욱 아늑한 이명산 산자락 아래 약간 높은 곳에 있었다. 문학관 바로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주변이 조망되는 좋은 위치였다. 축제 기간은 끝났지만 주변 밭에는 아직 흐드러진 코스모스가 군데군데 있어 가을 정취를 전했다.
문학관 내부에는 기대했던 것만큼 자료가 많지는 않았다. 그저 선생의 삶의 자취를 한번 훑어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전시물보다는 주변 자연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더 마음이 가는 곳이 이병주문학관이었다.
소설 ‘지리산’은 일제 말과 해방 공간을 배경으로 지리산 일대에서 벌어진 빨치산 투쟁을 다룬 대하장편소설이다. 내게는 지리산에 얽힌 개인적인 추억이 많다. 한때 지리산 산길과 생태계의 아름다움에 반해 몇 년을 부지런히 등산을 다녔다.
그렇게 지리산을 오가던 어느 무렵부터인가 지리산 인근의 작은 마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리산은 그 자신만큼이나 오래된 작고 예쁜 마을을 산자락마다 품고 있었고, 도시에서 자란 내게 고향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그 정겨운 농촌 마을들이 빨치산의 무수한 죽음을 품고 있음을 알았을 때는 많이 놀라기도 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지리산에서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나야 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리산은 내게 ‘국립공원’을 넘어서 우리의 오늘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실마리를 간직한 공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설 ‘지리산’은 내가 지리산에서 느꼈던 의미의 빈자리를 등장인물들의 피와 살이 담긴 이야기로 채워준 소설이다.
이병주 선생은 학병세대 출신이다. 학병세대란 일본 유학생 신분으로 태평양전쟁에 강제 징집된 조선 청년들을 말한다. 이들은 일본군 하급 장교로 참전했기에 사병으로 징용된 병사들과 구분된다. 당시 기준으로 엘리트였으므로 자신의 참전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약 5~6천 명 정도로 추정되는 학병세대 중에서 유명한 인물로는 만주에 있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서 6천 리 대장정 끝에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을 찾아가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 선생과 김준엽 선생이 있다.
학병세대 중에서 유일한 소설가가 이병주 선생이다.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으며, 교수와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하동은 함양, 남원, 산청, 구례와 함께 지리산에 접한 다섯 개 시군 중 하나다. 일본 유학 중에 징집되었다가 해방 후 고향 하동에 돌아온 선생은 자신의 친구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민초들의 처절한 죽음을 목격한다. 그가 가장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이념 대립의 와중에 모두 희생되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고도 살아남은 이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이념 갈등으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은 비극 중 비극이었다.
아마 이런 경험이 그로 하여금 ‘한반도 영세중립국화’를 주장하게 했을 것이다. 이 시론 때문에 5.16 군사정부 때 반공법 위반으로 2년여간 수감되기도 했다. 평소 그는 한이 많아 글을 쓴다고 했고 좌절하고 실패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밝혔다. 그 좌절하고 실패한 역사의 무대가 지리산이었다.
원래 빨치산은 일제하 강제 징집을 거부하고 지리산에 입산한 이들이 시초였다. 해방 정국에 여순사건을 일으킨 남로당 계열의 군인들이 지리산에 피신하고, 일제 때 무장 독립투쟁을 했던 남로당의 이현상이 이들을 ‘남부군’으로 규합하면서 지리산은 남북 대결의 장이 되었다. 6.25가 일어나자 빨치산은 지리산을 나와 북한 접경 지역인 강원도까지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다시 돌아가 투쟁하라는 북측의 지령으로 지리산에 돌아온다. 지리산은 사방으로부터 고립된 지역이므로 북한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는 한 그들의 죽음은 예고되어 있었다. 몇 년을 산속에 갇혀 추위와 굶주림을 감내하던 빨치산들은 국군의 토벌 작전으로 모두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이병주 선생은 소설에서 공산주의에 일관되게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데, ‘지리산 비극’의 가장 큰 책임이 빨치산 투쟁을 장려한 김일성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시기 역사의 세부적인 면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북한이 지리산 빨치산을 이용하고 버렸다는 비난은 피할 길 없어 보인다. 북한은 6.25 포로 송환 대상으로 지리산 빨치산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해방 정국에 대한 소설 속 묘사는 지나치게 단순한 감이 있다. 소설에는 박헌영이나 이현상 등의 인격이 저열하게 묘사된 반면 이승만 정부의 무능이나 복잡한 국제 정세에 대한 충분한 시각은 드러나 있지 않다. 소설이 발표된 1970년대 유신 치하의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가의 시대 인식의 한계와 그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보는 것 또한 우리 시대에 이 소설을 읽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병주 선생이 얼마나 정직하게 그 시대를 묘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의 결말은 그의 고뇌가 정직한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선생은 소설에서 그 모든 대립과 투쟁이 ‘허망한 정열’에 바쳐진 세월이었으며 “나에겐 조국이 없다. 오직 산하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좌우로 찢긴 조국이 아니라, 지리산이라는 자연의 품에 귀의했다. 빨치산은 남한에게는 소탕의 대상이었고 북한 또한 휴전협상 때 빨치산을 철저히 외면했으니, 이 젊은이들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셈이고 작가는 ‘자연’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소설 속 주인공격인 하준규와 박태영은 결국 ‘지리산’을 택했고, 지리산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그들이 발 딛고 설 수 있는 곳은 지리산밖에 없었다.
이병주 선생이 지리산에서 본 것은 결국 ‘절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는 그러한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정직한 고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한 사실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에서는 2만여 명이 죽어갔습니다. 파르티잔(빨치산)과 군경 토벌대인 이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지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지 간에, 또 파르티잔의 상당수가 잘못 선택한 길을 갔던지 간에 그들의 죽음은 민족과 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합니다. 2만여 생명이 죽어간 민족의 비극을 그냥 묻어둔다는 것은 기록과 문자가 있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들의 일이 가슴에 호소하는 그 무엇으로 남겨져야 합니다. (이병주)
어떤 장소는 그곳이 장소로 끝나지 않는다. 긴 시간을 두고 거듭 방문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 곳, 그런 곳을 우리는 순례지라고 부른다. 내게는 지리산을 둘러싼 모든 것이 그런 순례지로서 의미를 지닌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