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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Aug 25. 2019

화엄 세상을 향한 꿈/ 구례 화엄사

내게 특별한 여행지 (3), 2015년 2월


지리산 화엄사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했다. 대구에서 남원, 남원에서 구례, 구례에서 화엄사까지 이동에만 오전이 걸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보니 다소 불편하고 느린 여정이 되었지만 마을과 마을을 하나씩 거쳐서 목적지에 이르는 즐거움이 있었다. 역이나 터미널은 한 도시나 마을의 관문이어서 그곳에서 받은 조금씩 다른 인상들도 여행의 소중한 일부로 남는다.

  

남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광한루가 지척이어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남강의 젖줄 요천과 광한루를 한 바퀴 산책해서 좋았고, 남원에서 구례까지는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이어서 좋았다.


지리산 자락은 그 어디건 나를 감동시키지 않는 데가 없지만 그 산세의 웅장함과 더불어 화엄사의 위용과 아름다움도 기대 이상이었다.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 보제루 옆을 돌아 경내에 들어서면 국보 67호 화엄사 각황전이 예상치 못한 스케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중층 건물에 다포양식으로 지어져 단청을 입히지 않았는데도 화려하고 웅장하다. 목조건물의 품격과 멋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이 화엄사 각황전이었다.



  


각황전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나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대웅전은 각황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기품이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의 석등과 불탑 또한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이 모두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이 당연하다 느꼈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화엄 세계를 표현하고 있었다.

 

 ‘화엄(華嚴)’이란 모든 만물이 일체의 대립을 넘어 하나로 융화하는 경지를 뜻한다. 이는 화엄사의 가람 배치에도 반영되어 있다. 백제 때 창건되어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중수된 화엄사는, 대웅전보다 각황전이 훨씬 크고, 석등과 석탑, 다른 전각들도 조금씩 비뚤하게 자리해 있다. 그런데 대웅전과 각황전에 가기 전에 거치는 보제루를 다른 절처럼 그 아래로 통과하지 않고 오른쪽(동쪽)으로 돌아서 가면 이 모든 전각과 석조물들이 한눈에 반듯하게 들어오는 지점에 서게 된다. 하나하나는 비대칭적이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화엄사의 독특한 가람 배치는 선조들이 꿈꾼 화엄 세상을 예술적으로 구현한 것이라 한다.

  

석조물을 제외한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이다. 원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으나 안타깝게도 전소되었다. 숙종 때 중건된 각황전도 6.25전쟁 때 소실될 뻔했다. 지리산 일대 사찰이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까봐 염려한 정부는 소각을 명했다. 당시 명령을 받은 차일혁 경무관은 고심 끝에 “절을 태우는 데는 한 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며 각황전 문짝만 떼어내 불태우는 기지를 발휘한다.          


  

당시 차일혁 경무관이 구하고자 한 것은 화엄사만이 아니었다.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조선의용대 대원으로 만주에서 수년간 일본과 싸웠다―의 경찰로 빨치산 토벌대장이 된 그는 빨치산 대장인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사살에 공을 세우지만, 적군을 정중히 장례 지내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훈장은커녕 좌천된다. 좌익으로 몰려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한 이현상의 가족이 시신을 찾아가지 않자 차일혁 경무관이 직접 시신을 화장하고 철모에 뼈를 담아 M1소총으로 정성스럽게 빻은 후 솔숲에 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빨치산과의 전쟁이 동족상잔의 비극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괴로워했으며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적에게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줄곧 좌익 혐의를 받았고, 서른여덟의 이른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가 남긴 수기 ‘또 하나의 전쟁’에는 자신이 목격한 빨치산 토벌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963년에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체포되면서 이 비극적 전쟁은 끝이 났다.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고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한 이들은 1990년대에 북으로 송환되었다.

  

화엄사 입구에는 2013년에 세워진 차일혁 경무관의 공덕비가 있다. 이념 대립의 광풍이 지리산 구석구석을 휘몰아치던 때가 있었다. 지리산 화엄사는 그 비극의 소용돌이에서 동포를 살리고자 애썼고 그로 인해 핍박 받았던 한 의인의 용기를 전해주면서 ‘화엄’의 참뜻을 돌아보게 했다. 모순과 대립을 넘어선 참다운 조화, 화엄 세상을 향한 염원을 그 어디에서보다 강렬한 인상으로 마음에 새겨준 곳이 내게는 지리산 화엄사였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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