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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Aug 27. 2019

진실은 아직 오지 않았다/ 광주 5.18사적지

내게 특별한 여행지 (4), 2013년 9월


1


가을비가 살짝 흩뿌리는 날,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9월 초순, 대기가 아직 여름의 더운 기운을 간직하고 있어 날씨는 온화했고 내리는 비도 부드러웠다. 가는 동안 구름과 안개가 산과 마을을 휘감고 있었는데, 광주가 가까울 무렵에는 비구름 사이로 군데군데 하늘이 트이기 시작했다. 


88고속도로를 3시간 반을 달려 광주 유스퀘어에 도착하니 친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기 전에 나는 그에게 5.18 관련 사적을 돌아보고 싶다고 말해 두었다. 고맙게도 그는 이 기회에 광주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면서 하루 여행 일정을 세세하게 준비해 놓았다. 

  

마흔 살에 떠난 광주 여행. 대학 다닐 때 해마다 5월이면 ‘광주 망월동 순례’라는 대자보가 학내에 걸렸지만, 당시엔 다른 일로 바빠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뒤늦게 광주를 찾은 이유는 2012년 12월에 치러진 대선 후유증 때문이었다. 마음뿐 아니라 몸이 아팠다. 내가 바라는 후보가 당선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독재자의 딸’과 ‘그 독재에 맞섰던 인권변호사’의 대결에서 나는 시민들이 전자의 손을 들어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과가 하도 믿기지 않아서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과거에 대한 향수 이런 것 말고, 아주 객관적으로, 정직하게 1970년대는 어떤 시대였는지 말씀해달라고. 70년대에 이십대와 삼십대를 보낸 아버지는 강한 어조로, 한 마디로 답하셨다.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었다.  


어머니께 여쭤보았다.

 


말도 마라. 좋긴 뭐가 좋아.
애들 키워서 어떻게 학교 보내나 싶었다. 데모할까 봐.


70년대면 나와 동생이 태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자녀가 몇 살 되지도 않았는데 대학 가서 데모할 일이 벌써 걱정되더라고 하셨다. 그만큼 험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선택은 달랐다. 어떤 경우에도 독재자의 딸이 뽑히는 일은 없을 거라던 내 상식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순진하게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온도를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막연하게 광주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로 배운 역사로는 부족했고 내 눈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광주를 찾았다.    


      

  


친구와 함께 맨 처음 간 곳은 5.18자유공원이다. 당시 교직에 계셨다가 지금은 은퇴한 문화해설사로부터 광주 항쟁의 배경과 열흘간의 항쟁 일지를 직접 들었다. 1979년 유신독재를 펼쳤던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피살된다. 이를 수습하는 중에 전두환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이 때문에 다음 해 봄부터 대학가에 시위가 번진다. 1980년 5월 16일, 서울역 광장에 모인 대규모 학생 시위대는 일단 사태를 관망하자며 해산했다. 5월 17일 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서울, 부산, 대구가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5월 18일 광주가 일어선다. 

  

그날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났건만 설명하시는 분의 목소리가 간간이 떨려왔다. 5.18이 당신 마음에 어떤 의미로 박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가는 어떤 것을 애써 붙들고자 하는 안타까움도 느껴졌다. 친구가 말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 행해진 5.18에 대한 끊임없는 왜곡 보도에 광주 시민들이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광주 시민들은 5.18이 단순히 특정 지역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역사로 기억되는 것을 항상 우려하고 있다고 말이다. 광주 시민들은 5.18이 한국 민주주의에 기여한 살아있는 역사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5.18자유공원에는 당시 사람들을 가두고 재판하던 군 관련 시설을 그대로 이전해 놓았다. 판옵티콘 구조로 사람들을 감시하게 만들어놓은 유치장과 재판소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세트장을 보는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현장을 보는 것 같은 당혹스러움이 내내 따라다녔다. 내 나라에서 일어난 일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모든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광주에 와서 알았다. 우리가 5.18을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하지 못한 채로, 그 시대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의 ‘오늘’ 또한 의미가 온전하지 못한 게 아닐까 했다.  

  



자유공원 바로 옆에는 김대중컨벤션센터가 있었다. 김대중홀을 보기 위해 들른 곳인데 홀이 작은 규모여서 금방 둘러보았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시작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옥중에서 이휘호 여사께 보낸 친필편지가 눈에 띄었다. 작은 종이에 빼곡히 쓰인 글씨들이 마음에 소로록 내려앉았다. 




  

그곳에서 몇 블럭 떨어진 곳에 무각사란 사찰이 있었다. 무각사에서 점심을 먹고 공원 사이로 난 숲길을 한 바퀴 돌자 5.18기념재단이 나왔다. 유네스코 등재 기념 전시관이 그곳에 있었다. 재단에서 5.18에 대한 개인적 증언과 사료를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직 자료 정리가 덜 되어 좀 엉성한 감이 있었는데, ‘주이택’이라는 분의 일기를 인상적으로 보았다. 개인의 일기가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새로웠고 그의 눈을 통해 본 당시 풍경이 아프고 절절했다. 

  

재단 옆에는 5.18기념공원이 있었다. 공원 지하에는 추모 공간이 있었고 지상의 잔디밭에는 학생 희생자들의 출신학교와 이름이 적힌 기념물이 있었다. 몇 사람의 사연도 소개되어 있었다. 사람 목숨이 다 같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의 죽음은 비통함이 더욱 컸다. 시위 진압을 위해 광주에 들어온 공수부대는 어린 학생과 여성들도 대검으로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어떤 경우에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였다. 

  

공원에는 ‘오월루’라는 꽤 높은 누각도 있었다. 올라가니 광주 시가지와 무등산이 한눈에 보였다. 오월루에서 처음 보는 무등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으나 병풍처럼 넓은 어깨를 펴고 서 있는 모습이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 이름에서도 자태에서도 기대고 싶은 어떤 듬직함이 풍겼다. 

  

오월루를 내려와 다시 무각사에 가서 친구와 차 한 잔을 마신 후 시내를 벗어났다. 망월동에 있는 국립 5.18민주묘지로 가는 길이다. 구 묘역에 먼저 들렀는데 이한열 열사의 무덤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고 듣는 이름이었다. 신 묘역은 구 묘역 옆 넓은 대지에 새롭게 조성된 곳이었다. 분향을 하고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은 무덤도, 기념관도 아닌, 희생자들의 사진을 모아놓은 집이었다.         


 

 

마지막으로 전남대에 들렀다. 전남대학교 정문은 5.18 사적지 1호로 5.18이 시작된 장소이다. 5월 17일 밤, 전국 대학가에 휴교령이 내려진다. 군인들이 학교 입구를 지키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 5월 18일, 전남대 정문 앞에서 몇몇 학생들이 계엄 철폐를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 구호를 외친 학생들은 오십여 명이었으나 그들의 용기에 시위 학생 수는 몇 백 명으로 늘어났다. 계엄군이 학생들에게 마구 곤봉을 휘두르자 시위대는 금남로로 이동하고 민간인을 향한 계엄군의 무차별적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점차 합류하면서 5.18은 시민 항쟁으로 확대된다. 

  

사범대 건물 외벽에는 1990년에 그려진, 이제는 색이 바랜 벽화 ‘광주민쟁항쟁도’가 있었고, 법대 앞에는 ‘박관현 열사 정신 계승비’가 당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5.18 때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는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스물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명한 금남로와 공사 중이어서 가림막을 쳐놓은 옛 도청 건물은 차로 지나가면서 보았다. 도청은 5월 27일, 투항 권고를 물리친 시민군들이 최후까지 싸웠던 장소이다. 5월 21일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를 시작하자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의 무기고를 열어 ‘시민군’을 결성한다. 계엄군이 상부의 지시에 따라 외곽으로 후퇴해 광주를 봉쇄하는 사이에 시민군은 도청을 점령했다. 이 며칠간 광주는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었으나 일종의 해방구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음식을 나누었으며 단 한 건의 약탈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를 몰고 광주로 진군한다. 2만 5천명의 군인이 동원된 작전 ‘화려한 휴가’였다. 도청에 마지막까지 있었던 시민군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카빈과 M1소총을 지닌 시민군이 고도로 훈련된 최정예 공수 부대원과 끝까지 맞선 것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놀랍고도 충격적인 장면이다. 총격전 끝에 도청에서만 15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열흘간의 광주 항쟁은 막을 내린다. 


  


김태일 감독의 다큐 ‘오월애(愛)’에서 본 바에 따르면, 이 자리에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을 짓자는 프로젝트가 생기면서 도청 별관 건물을 보존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화면 속에서 한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내 자식이 거기서 피를 흘리고 죽었는데 내가 거기를 못 지키면 사람도 아니여.” 

  

그 아픈 기억을 간직한 할머니는 지금 우리 곁에 살아계시다. 5.18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그분들의 오늘의 삶이자 우리들의 오늘의 문제였다. 희생자나 유족 뿐 아니라 1980년을 바로 눈앞에서 겪은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그때 20대였던 청년들이 지금 50대와 60대의 나이로 건재하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생생한 아픔과 자부심으로 살아 있는 5.18을 박제로 만드는 이들은 누구일까. 5.18 관련 사적지를 도는 ‘518번 버스’가 막 우리 옆을 지나갔다. 하늘엔 붉은 노을이 번졌다. 

  

33년 전 봄날,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에 저항한 것은 오직 광주뿐이었다. 열흘 만에 처참하게 막을 내렸지만, 그 열흘의 시간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빛이 없었다면 87년 6월항쟁도 없고 군부독재는 더 긴 시간을 버텼을 것이다. 계엄군 앞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광주 시민들이 홀로 총을 들었다. 그들이 국가의 폭력 앞에 목숨을 내던졌기에 해방 이후 이 땅에서 수십 년간 반복되어 온 억압과 살상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었다. 

  

우리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할 때, 그것에 합당한 언어를 부여하지 못할 때, 말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표현되지 못한 말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누군가는 그 말을 가슴에 묻은 채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아직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도 공식적으로 언명되지 않았다. 

  

한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언제나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달려 있다. 말을 확정하고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이다. 동시에 그 미래는 도식화되고 박제화된 언어를 넘어서 우리가 진짜 말을 찾아냈을 때, 그 말을 자신 있게 내뱉을 수 있을 때 우리에게 도래한다. 

  

봄날은 끝났지만 진실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말이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그 말들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기를.




2


친구의 안내로 5.18기념공원 지하 추모공간으로 향하는 길을 내려가자 그곳에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벽면 가득히 새겨진 내가 모르는 타인들의 이름. 아이, 소녀, 청년, 어른의 이름. 몸은 떠나고 이제 세 글자의 음절로만 벽에 남아 있는, 80년 광주의 이름들입니다.

  

한나절 동안 광주 여러 곳을 둘러봤지만 내 마음에 가장 강한 이미지로 남은 건 5.18기념공원에서 만난 이 이름들이었어요. 망월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이 이름의 주인공들을 사진으로 만났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이름들이 더 애틋했습니다. 그리고 이 낯모를 이름들로부터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의 정체를 알지 못해 더듬거렸어요. 

  

이 이름들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 눈을 아프게 하는 까닭이 뭘까요. 이름 앞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고통에 가까웠습니다. 벽에 있는 이름 하나하나가 마치 누군가의 시선처럼 나를 꿰뚫어보는 듯했지만 그 시선이 무슨 말을 전하고자 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이름들을 응시하며, 이 이름이 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볼 뿐이었어요. 

  

야외 정원에는 학생기념탑이 있었습니다. 80년 봄날에 희생된 초 ․ 중 ․ 고교 학생들의 이름이 따로 또 적혀 있는 곳입니다. 사연을 읽는데 “산이 되고 강이 되는 사무침”이라는 글귀가 가슴을 치고 지나갑니다.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 학생의 사연입니다. 사망일은 5월 27일, 사망 장소는 도청 안, 사망 원인은 복부와 목의 총상입니다. 당시 군인으로 광주 진압에 동원되었던 이경남 목사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가 도청을 진압했던 동료로부터 들은 말에 따르면, 막상 군인들이 진입했을 때 시위대는 차마 총도 쏘지 못하고 망설이는 어린 학생들이었다고 합니다. 문재학 학생도 그 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증언자는 39세의 어머니 김길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으니 그 사무침을 어찌 말로 다할까요.          

  


이 세상 수많은 존재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이름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후대에 전하고자 합니다. 기록과 증언은 우리가 과거를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 ‘역사의 시간’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숭고한 행위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인 것입니다. 기록과 증언은 우리가 미래에 어떤 시간을 살고 싶은가 하는 물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추모 공간 또한 그러한 질문과 바람을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억이 진정한 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이름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이름들의 벽 앞에서 나는 어떤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뿐 아니라 그 이름 하나하나가 지닌 빛이, 그들의 개별적인 목소리들이 지금 이 시간 속에서 부활했으면 하고 소망한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 돌아와서 그들 가슴속에 품은 소중한 이야기를 꺼내어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지닌 이야기들이 충분치 않고 우리의 기억 또한 풍부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 이야기들을 필요로 했고 그 이야기들이 그리웠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분명치 않지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어요. 죽은 자들의 세계에 건너갈 수는 없지만, 산 자들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세계 사이에 있는 어떤 곳, 혹은 산 자들의 가슴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 어떤 곳에는 다다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어요.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흐릿한 언어로 잠시 붙잡아두는 것밖에 없음이 안타까웠습니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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