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특별한 여행지 (5), 2004년 5월
5월의 남도는 가도 가도 보리밭, 이처럼 보리밭을 많이 보긴 처음이다. 햇살을 받아 엷게 빛나는 누런 보리의 물결과 갓 물대기 시작한 논의 아름다움에 취해 나는 차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 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어느 결에 내 기억 속에선 잊고 있었던 노래 하나 피어오른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종달새도 한 마리 파르르 날아오를 듯하지만, 그건 이미 내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세상이다. 우리 엄마 어렸을 적엔 아이 어깨까지 올라오는 보리 사이를 걸어다니곤 했다 하는데, 지금 보리는 키가 무척 작다.
친구 말에 따르면 이제 반도에서 보리를 보기 힘든 까닭은 정부가 과거처럼 수매를 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대부분 농가가 보리를 재배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몇몇 농가만이 맥주회사나 음료회사와 계약재배를 할 뿐이라고. 나는 이 들판이, 우리 농촌이 아직 버티고 있는 것만도 감사하여, 내려서 보리밭을 걷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첫 번째 목적지는 순천 낙안읍성이었다. 잘 조성된 조선시대 마을로 생동감이 있다. 임경업 장군이 하루만에 건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 5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500년 전이라면 어제처럼 가까운 시간이라고 하시던 김수업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언제부터인가 내게도 시간이 예전과 다르게 감지되었다.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나와 꼭 같이 사랑하고 고뇌하며 한 생을 보냈으리라 생각하니, 그들이 바로 내 동무처럼, 동시대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주민들이 직접 살고 있다는 초가들을 미처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출발 시간이 되었다. 충분한 시간을 허락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바삐 길을 재촉한 버스는 끝없이 펼쳐진 갯벌 앞에 우리를 내려놓고, 아이들은 바다를 향해 뛰어간다. 뻘에서 뛰고 뒹구는 아이들은 ‘자연’처럼 자연스럽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땅끝마을로 가는 길. 절벽을 따라 난 오솔길을 걸어 땅 끝에 섰다. 반도의 끝, 감회가 새롭다. 여기서 보길도는 지척인 모양이었다. 보길도로 바다로 끝없이 달려가는 마음을 붙들어 매고, 우리의 여정은 진도대교로 이어졌다. 해남군과 진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연결한 진도대교를 걸어서 우수영에서 이순신을 만났다.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하여 거의 궤멸된 시점에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그 해 9월, 남아 있던 12척의 배로 이 울돌목 바다에서 왜군을 기다린 이순신 장군은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다. 이후 전쟁의 판세를 결정한 ‘명량대첩’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난중일기’를 꽤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오늘 날씨는 어떻고, 무엇을 손질했고, 누가 왔고…. 그 지루한 내용이 지닌 의미를 알아차린 건 내가 어른이 되고 난 후였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과의 싸움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었는데 이는 세계 해전사에서 독보적인 기록이라고 한다. 난중일기에서 볼 수 있는, 매일 매일에 걸친 그의 철저한 준비성이 낳은 결과였다. 그의 놀라운 성실함은 여전히 내게 감동을 준다.
이곳 해남 땅에서 만날 수 있었던 반가운 이가 또 있으니, 윤두서 선생이다. 조선조 이름난 시인 고산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에서 윤두서의 자화상과 마주친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공재 윤두서 선생은 윤선도의 증손자로 관념적인 조선의 화풍에 반발하여 사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자화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불타는 듯 뜨겁고 날카로운 그 눈에서 나는 어떤 분노를 읽고, 깨어있는 정신을 읽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선 담담함을 읽는다. 그는 마흔 여덟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은 늘 그런 사람들이다. 한 시대의 최고를 풍미했던 사람이 아니라, 시대와 불화하고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던 사람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의 아픔이야말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실을 일깨워주는 법, 자기 시대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았던 선인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오늘에까지 깊은 울림을 전한다.
마지막 날, 안개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다산기념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학사상은 물론이거니와, 수원성, 거중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천재를 발휘했던 그의 생애를 요약적으로 둘러볼 수 있었다.
기념관을 나와서 다산초당으로 향했는데, 다산초당과 천일각을 거쳐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산길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산길을 오르며 다산 선생의 발자취를 하나씩 만날 수 있었다.
선생의 18년 강진 유배 생활 중 십여 년을 보낸 곳이 바로 다산초당. 여기서 선생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원래는 초가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와집으로 꾸며졌다. 아담하고 정갈한 집과 연못에서 선생의 고결한 성품이 느껴졌지만, 원래 모습대로 초가를 두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배 생활에서 목격한 백성들의 피폐한 삶에 고통 받았던 다산은 이곳에서 그 유명한 목민심서를 쓴다. 목민심서에서 그리고 여전제와 같은 토지개혁제도에서 나는 전란으로 무너진 사회를 살아야 했던 그의 고뇌를 짐작해본다. 그러기에 다산초당은 이름난 서원이 들려주지 못하는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산자락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다산초당을 떠나 계속 산길을 오르자 탁 트인 길모퉁이에서 천일각이 우리를 반긴다. 천일각에서 강진만을 내려다보며, 맑은 숨을 가득 들이쉬었다. 어쩌면 이곳은 다산 선생이 살았던 2백 년 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일각을 뒤로 하고 산길은 계속되어 드디어 신라 때 창건된 천년고찰 백련사에 이르렀다. 고려시대 참회와 정토를 강조한 백련결사 운동의 중심지. 백련사에서 내려다본 해안선과 바다의 모습은 잊지 못할 절경이었다. 그 풍경을 가슴에 담고 동백숲의 향기에 취해 나는 허위허위 길을 내려왔다.
이 땅에서 피고 졌던 그 모든 이야기들이 과거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처럼, 나의 일부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건 내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걷는 데 지친 아이가 묻는다. 여기까지 뭐 하러 왔느냐고.
우리의 삶이 어제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수많은 삶의 매듭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 아이들이 이해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우리가 못 다 이룬 꿈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앞으로 백 년이 더 지난 후에도 어느 누군가는 더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 분투하고 있을 것을 나는 안다. 공재 선생의 꿈도 다산 선생의 꿈도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는 한 현재진행형이다.
마지막 목적지인 보성차밭으로 가는 길,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쨍쨍하다.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뻗은 삼나무 숲길을 지나자 푸른 차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몽실몽실한 초록빛의 차밭 언덕 사이를 걸으며 여유와 평화를 한껏 만끽했다. 사람들 얼굴마다 미소가 가득하다. 내 눈과 마음의 먼지도 말끔히 씻겨 나갔다.
그 땅이 지닌 아름다움으로 인해 내내 행복했던 남도 여행. 반도에서 그나마 아직 개발의 손길이 덜 닿은 곳이라 그간 이곳 사람들의 팍팍했을 삶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남도는 고향같이 푸근한 정취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유배지 남도 땅에서 만난 역사 속 인물들도 다른 곳에서 만난 위인들과 사뭇 달랐다. 시대적 모순의 한복판에서 세상이 나아가야 할 길을 고심했던 분들에게서 나는 오늘을 살아갈 힘과 지혜, 용기를 얻는다.
그러므로, 이 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남도로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진실이 녹아 있는 그곳에서, 희망을 찾는, 인생이라 불리는 우리의 여행길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됨을 가슴 깊이 담아 돌아올 것이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