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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Aug 28. 2019

슬픈 바닷가/ 여수 만성리

내게 특별한 여행지 (7), 2016년 9월


때로는 단 하나의 풍경이 한 도시의 전체적인 인상을 결정한다. 여수 만성리 바닷가가 내게는 그러했다. 


일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서 일제시대에 건설되었다는 ‘마래터널’을 통과하면, 도로 오른편으로는, 폐선을 활용한 레일바이크 길과 그 너머 푸른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고, 도로 왼편으로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작은 표지판과 함께 만성리 민간인 집단 희생지(여수시 만흥동 149-1번지 일대)가 자리해 있다. 

  

여순(여수 ․ 순천) 사건 직후인 1949년 1월, 죄 없는 민간인 250명이 좌익 세력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아 인근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서 총살당하고 불태워져 이곳에 암매장되었다. 만성리 희생지에는 위령비가 서 있었고, 인근에는 ‘형제묘’라는 비석이 놓인 큰 무덤이 또 있었다. 가족의 시신을 찾을 길 없던 유족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대체 이곳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여순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남로당 계열이었던 여수 14연대 군인들이 “동족을 죽일 수 없다”면서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한 출동을 거부하고 일대를 무력으로 점거하면서 일어난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군을 내려 보내는데, 초기 사령관은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이었다. 온건파였던 그는 반군과 민간인을 분리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진압 작전의 주도권은 김백일, 백선엽 등 강경파에게 넘어간다. 10월 27일, 진압군은 여수를 탈환하지만, 2진으로 도착한 경찰 부대가 경찰 가족들이 무참히 학살된 것을 목격하면서부터 군경의 합동 보복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현상 평전’의 저자 안재성 작가에 따르면 우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3000~7000명, 좌익에 의한 학살이 1200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저 양쪽 모두의 잘못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것은 그의 말처럼 이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순 사건은 제주 4.3과 더불어 해방 후 우리 민족이 겪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좌우의 이념적 갈등을 넘어, 동족이면서 서로를 죽여야만 했던 절망감과 뼈에 사무치는 증오가 서로에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이 땅에 들어온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들은 치안 안정을 이유로 일제시대의 경찰 및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하여 민중의 분노를 샀고, 쌀값 폭등 등 극심한 식량난이 발생하면서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이런 때에 군인들의 봉기로 치안에 공백이 생기자 이 혼란을 틈타 과거에 친일을 했던, 혹은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지주나 군경 가족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극우 세력은 주민들을 몰살하는 방법으로 복수했다. 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이 특히 심했다. 상대편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해방 후 일제에 부역한 민족반역자들을 공적인 재판에 회부하여 제대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미군정 시기에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정부 수립 이후 구성되었다. 친일파를 기소하거나 재판하는 것은 사법부의 영역이므로 반민특위의 활동은 친일 행적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조사만 하는 기구인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비협조 및 친일 경찰의 테러 등으로 와해된 것을 보면 이 배후에 누가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 수 있는 자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동족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자들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친일파 그룹에게 해방 후 민족의 분열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반공(反共)’을 기치로 삼아 권력 재창출에 성공한다. 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말마따나 한 국가의 이념이 평화나 인권 같은 것일 수는 있어도 ‘반공’이 될 수는 없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친일 청산은 물 건너갔고, ‘반공’은 더욱 공고해졌다. 

  

만성리 학살 유적지는 쓸쓸했다. 위령비가 있는 자리는 물론이고 근처의 형제묘 또한 누군가 두고 간 꽃이 그 마음을 말해줄 뿐 아직 주변 정리가 되지 않아 거의 방치되다시피 버려져 있었다. 페인트칠이 벗겨져가는 안내 표지판에는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적혀 있어 이 안내판을 그때 세웠음을 말해주었다. 이후 죽 방치된 것 같았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만성리 학살 유적지 바로 옆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레일바이크를 타고 있었다. 관광지 여수의 풍경이었다. 이 두 개의 상반된 풍경을 보며 나는 ‘아,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구나’ 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을 때 그 과거는 반복될 수 있다.분열된 민족사와 국토 전역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반성이 필요한 이유는, 그런 반성을 거치지 않은 민족의 통일은 또 다른 분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미래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 

  

그러나 여수는, 적어도 이곳에서는 과거를 기억하기를 원치 않는 듯했다. 마래터널 앞으로 난 일차선 도로를 이차선 도로로 확장한다는 공사 안내문과 함께 그 일대에 남아 있는 분묘의 연고자를 찾는 안내문이 보였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해방 직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현장을 훼손하면서까지 도로 확장공사가 필요한 것일까. 

  

마래터널 입구에서부터 만성리 학살지까지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그곳을 걸어서 통과하면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품을 수 있는 그런 순례길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그 길에서 바라보는 여수 앞바다의 풍경은 레일바이크로 즐기는 풍경과는 사뭇 다를 것 같다. 그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 위로 잘못된 역사를 치유하고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가 오랜 시간 노력해온 시간의 두께가 더해져 이 땅에 대한 더 깊고 진실한 애정이 자라날 수 있을 것 같다. 

  

한때 공포의 땅이 되었던 곳을 그렇게 미래를 위한 소중한 배움의 장소로 태어나게 하는 힘이 우리에겐 아직 없음을 여수 만성리에서 보았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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