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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Aug 30. 2019

나는 걷는다/ 제주올레 1구간

내게 특별한 여행지 (9), 2009년 2월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 다비드 르 브르통
     


제주올레 1구간은 성산일출봉 주변 마을을 도는 길이다. 제주는 몇 번 왔지만 그 속살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대지와 바다를 만날 줄은 몰랐다. 걸어서 만나는 제주의 풍광은 드넓고 다채롭고 야생적이었다. 검은 현무암으로 쌓은 나지막한 돌담, 당근과 감자를 캐는 검은 흙밭, 바람에 흩날리는 억새, 오름에서 내려다본 해안선의 아름다움, 한치를 말리는 바닷가, 깨끗한 공기, 맑은 물빛, 바람, 그리고 하늘까지. 

  

차에 앉아서 본 풍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치가 특별해서라기보다는 다르게 지각되기 때문이었다. 두 발로 걷는 순간, 우리 눈과 귀와 피부의 감각이 생생하게 깨어나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 비로소 세계의 풍경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고, 우리 역시 그 세계의 일부가 된다. 피상적이던 존재감이 커지고 우리는 이 세계 안에 튼튼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제주는 지리산과 같은 장중함은 없지만 화산섬이라 아기자기하고 다채로운 자연이 있었다. 도보여행은 그 자연을 속속들이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특히 화산 분출물이 만들어낸 작은 봉우리인 ‘오름’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다. 제주에는 오름이 총 368개가 있다고 하는데, 한라산 자락과 잇닿은 중산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제주올레 1구간의 백미도 두 개의 오름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1구간 시작점에 말미오름이 있었다. 146m의 낮은 오름이지만 말미오름에서 내려다본 성산포 일대의 정경은 탄성을 자아낸다. 억새를 벗 삼아 언덕길을 오르면, 동서남북 시야가 환히 열리고 탁 트인 들판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직 봄기운이 돋기 전인 2월인데도 밭은 푸른 채소로 가득하다. 군데군데 작은 오름도 솟아 있다. 해안선을 따라 바다로 시선을 돌리면 둥그스름한 수평선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그 수평선을 따라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나란히 누워 있다. 

  

말미오름을 통과하는 길은 바로 옆의 알오름으로 이어졌다. 알오름은 새알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말미오름과 알오름은 개인 소유의 땅인데 올레꾼들에게 개방되었다. 지도에는 이 둘을 합쳐서 ‘두산봉’이라고 부른다. 말미오름에서는 소가, 알오름에서는 말이 방목된다. 그래서 이 귀한 땅이 개발로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같다.          


  

알오름을 지날 때부터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제주의 거센 바람이었다. 바람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내 몸을 뒤흔들었다. 아마 내 생애 이토록 큰 바람을 맞아본 건 처음이지 싶다. 머릿속까지 얼얼했다. 바람은 알오름을 내려와 종달리 해안도로를 걷는 내내 계속되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나 있는 올레길은 성산일출봉 앞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걸으면서 멀리서 종일 바라본 일출봉! 푸른 색과 감귤 색 화살표가 5시간 동안 우리를 안내했다. 5시간의 기다림 끝에 눈앞에 마주한 일출봉은 예전에 버스에서 내려서 볼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고대하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친숙하다. 

  

성산일출봉을 지나서 1구간의 종점 광치기 해안을 향해 걸어가는데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바닷가에서 서성이는 갈매기 한 마리에게 인사하고 아쉽지만 길을 마쳤다. 노곤함이 서서히 밀려왔는데, 깊고 평온한 노곤함이었다. 

  

철학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하루 4시간 이상 걷지 않으면 삶을 삶답게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올레 길에서 그 말을 실감했다. 걷다 보면 존재의 복원력이 절로 작동한다. 지나친 자의식은 진정 되고 쓰렸던 마음도 평온을 되찾고 가슴에선 다시 노래가 피어오른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길이 끝나는 곳까지 계속해서 걷고 싶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열릴 때까지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끝없이 걸으며 이 끝없는 세계와 영원히 마주하고 싶다. 춤추는 바람과 햇살과 파도를 만끽하며 걷노라면 알게 된다. 이 세계를 느끼는 것, 그 자체가 무한한 행복이고 오르가즘이라는 것을.      


@2009


말미오름에서 바라본 우도(왼쪽)과 성산일출봉(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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