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특별한 여행지 (11), 2009년 10월
세월이 흘러도, 시간이 지나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폭력의 흔적이다. 그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은 홀로코스트. 수십만을 죽음으로 몰고 간 킬링필드나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같은 사건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여 수많은 유태인을 죽게 한 아이히만은 겉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조직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그를 괴물로 만들었다.
제주올레 11구간은 제주민의 삶과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 아침 안개가 내려앉은 고적한 들판 사이를 두 시간쯤 정처 없이 걷다가 만난 양민 학살의 현장 ‘섯알오름’은 충격이었다. 4.3사건도 알고 있고 이승만 정권 때 민간인 수십만을 학살한 보도연맹사건 등도 알고 있었지만, 이백 명 가량의 시신을 발굴한 흙구덩이 앞에 직접 서니 그 슬픔의 무게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들을 죽인 건 일제가 아니라 해방된 조국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섯알오름은 4.3사건이 진정되는 국면이던 1950년 6월, 일제 식민지 치하의 ‘예비검속법’을 적용하여 이백 여 명의 사람들을 법적 절차 없이 한밤에 집단학살하여 암매장한 곳이다. 유족들이 이를 새벽에 알아차리고 시신을 수습하려고 하자 계엄군이 무력으로 저지해 무려 7년 동안이나 출입금지구역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1956년이 되어서야 유가족의 끈질긴 탄원으로 61위를 수습하고 곧이어 132위를 수습하여 백조일손지지―조상이 다른 백 서른 두 명이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에 안장하였다. 총 212위가 발굴되었고 아직도 40위가 이곳에 매장되어 있을 걸로 추정되어 재발굴이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을 한밤중에 총살한 이는 모슬포 주둔 해병대 3대대였다. 이들은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 이해하였을까. 마을 사람들을 죽여도 되는 불순분자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상부의 명령에 다만 복종했던 걸까. 그 처참한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 남은 생을 살아냈을까. 뒤늦게라도 역사 앞에 반성하고 사죄했을까. 아니, 그런 명령을 내린 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이제 식민지의 질곡에서 간신히 벗어난 시점에서 이 가련한 백성들을 그렇게 무참히 죽여야 했을까.
섯알오름을 지나서 오른 모슬봉에는 마을 공동묘지가 있었다. 무덤 사잇길을 지나 모슬봉 정상에 올라가 바라본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시야가 탁 트여서 동으로는 한라산과 산방산, 남으로는 형제섬과 송악산까지 가슴에 담긴다.
그러나 모슬봉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땅, 산과 들판은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땀과 눈물을 껴안고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폭압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역사를 향한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이 마을에 살았던 이들은 이제 흙속에 묻혀 산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고 한라산이 이 모든 것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었다.
@2009
**2018년에 다시 갔을 때는 섯알오름 일대가 공원으로 새로 단장되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