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특별한 여행지 (14), 2017년 1월
여행지에서 사람들의 경험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일까. 장소의 특성보다는 여행 방식이 더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내게는 제주가 그런 경우였다.
올레 1구간에서 15구간까지 2년여에 걸쳐 틈틈이 도보여행을 했다. 제주 해안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바람과 바다가 뒤엉켜 만들어낸 해안선의 절경에 취하고, 소박한 마을 골목길이 주는 평안을 맛보는 데서 내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지나쳐간 마을과 야산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역사의 흔적을 만났다. 일제강점기의 땅굴과 4.3사건의 흔적들이었다. 도보여행이 내게 선물한 것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었다. 역사를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실체로 맞닥뜨리게 한 곳이 제주였다.
제주4.3평화공원 방문은 그로부터 칠팔 년이 더 지나서 이루어졌다. 공원은 한라산 북동쪽에 있는 봉개동 절물자연휴양림 부근에 있었다. 남부 해안 쪽의 올레 길과는 방향이 달라서 그간 들를 짬을 내지 못했다. 이 일대를 보고 싶어 이번 제주 여행은 절물자연휴양림에서 머무는 것으로 계획했고 렌트카로 쉽게 찾아갔다.
제주4.3평화공원은 해발 450미터 중산간의 드넓은 부지에 조성되어 있었다. 인근에 절물오름, 민오름, 절물휴양림, 사려니숲길, 라헨느 골프장, 명도암 유스호스텔이 있었고 멀리 제주시의 푸른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는 넓고 탁 트인 공간이었다.
녹색의 기념관 건물은 4.3사건을 담는 그릇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기념관은 사료가 굉장히 풍부했다.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듯이 4.3사건이 촉발되고 진행된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고, 예술적 미감을 잘 살려서 여타 기념관보다 더 기억에 남았다. 물어보니 준비 기간에만 십 년이 걸렸으며 그 과정에 예술가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특별법 제정으로 예산이 보장된 것이 가장 주효했단다.
기념관을 둘러보며 내가 역사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깨달았다. 4.3은 단지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누적된 갈등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 근대사를 압축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4.3을 이해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실타래처럼 얽혀 전개된 사건을 보며 마음이 괴로웠다.
제주도는 일제 때도 가혹한 수탈과 ‘결7호작전’이라는 전쟁기지 건설에 시달렸는데, 해방 후에는 미군정의 폭정과 극심한 흉년으로 사상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 모여 가두시위를 벌인 민간인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분노한 제주도민은 중앙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총파업을 일으키고, 미군정은 제주를 좌익으로 몰면서 탄압을 시작한다. 서북청년단이 제주에 들어오고, 2,500여명이 검거되어 고문치사가 발생하고 고문으로 죽는 이들이 속출하자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 이들이 5.10 남한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여 투표를 보이콧하면서 제주 전체 3개 지역 중 2개 지역에서 투표 무효가 성립된다. 그러자 미군정은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하고 대대적 토벌에 나선다.
무장대와 정부군이 싸우는 동안 아무 죄 없는 양민 2만 5천에서 3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 숫자는 보도연맹 사건보다는 적지만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인명이 살상된 것은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에도 유래가 없던 ‘제노사이드’였다. 정부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양민도 적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인명 살상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수차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제주를 죽이는 길을 택했다. 제주도민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는 와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제주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가족은 그 억울함을 풀기는 고사하고 긴 세월 연좌제로 고통을 당한다. 국가 원수로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에 처음으로 4.3 당시 공권력의 남용에 대하여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
4.3사건으로 긴 세월 서로 도우며 살아갔던 제주의 공동체가 와해되었다. 나는 제주 중산간 지역이 자연환경이 척박하여 마을이 없는 지역인 줄 알았는데, 토벌 과정에서 주민들을 해안으로 이주시키면서 84개의 마을이 완전히 소거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부군은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이 해안에서 한라산으로 범위를 좁혀가면서 초토화 작전을 시행했다. 초토화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되었고, 4.3사건 중 발생한 대부분의 인명과 재산 피해는 이 작전 때문이었다. 재일교포 중에서 제주 출신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4.3으로 인해 가까운 오사카로 탈출한 사람들이 많아서라 한다.
기념관 뒤로는 드넓은 추념 광장을 끼고 희생자 13,903명의 위패를 모셔 놓은 위패봉안소와 수천 기의 행방불명인 표석이 있었다. 희생자 중 시신을 찾지 못한 이들과 4.3사건으로 구속된 후 각 지역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이들을 기리는 공간이었다.
들판을 가득 메운 수천 기의 표석들, 불행한 시대에 희생된 가엾은 민초들의 이름 사이를 거닐면서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의 심정이 들었다. 희생자들은 이렇게나 많은데 가해자들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70년이 지나는 동안 고위직은 물론 일반 군경을 포함하여 당시 학살에 가담한 이들이 참회한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 중 일부는 아마 제주 진압의 대가로 국립공원에 묻혀 있을 것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많은 비극이 그랬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화해와 상생을 피해자들이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희생자들을 추념하는 방식만으로는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 민초들의 희생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해와 상생을 말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지 않는다. ‘평화’는 가해자들을 공적인 자리에 소환하여 이 사회가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때 이룩되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그들에게 권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실한 증언도 참회도 없이 이 시대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제주4.3평화공원에서 우리의 평화는 아직 요원하구나 했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