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특별한 여행지(13), 2010년 1월 1일
서귀포 일대의 온화한 기후 때문에 날씨 걱정을 잊고 있었다. 한라산 성판악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볼 때부터 문제가 터졌다. 민박집 할머니가 가르쳐준 버스 회사에 전화하니 5.16도로에 사고가 나서 오늘은 더 이상 운행을 못 한다는 것이다. 택시를 알아보니 5.16도로로는 위험해서 십만 원을 줘도 못 간다고 했다.
뉴스에는 한라산에 폭설이 내렸다고 나왔다. 한라산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니, 정상까지는 못 올라가고 성판악 코스는 진달래밭대피소까지, 관음사 코스는 삼각봉대피소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혹시 사정이 좋아지면 정상 가는 길이 열릴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민박집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
“뭐 하러 힘들게 거기까지 가? 요 옆의 제지기오름에서도 일출 잘 보여. 올라가면 보목교회에서 떡국도 주고 차도 준다고. 성산일출봉 가봐, 차 한 잔도 안 줘. 제지기오름은 영험해서 소원 빌면 꼭 이루어준다니까.”
떡국 준다는 말에 특히 솔깃했다. 억지로 교통편을 구해 한라산을 갔다 치자. 힘들게 눈길을 올라가도 정상까지 가지 못할 수가 있다. 용케 정상까지 갔다 하더라도 부근에 구름이 많아서 일출을 못 볼 확률도 높았다. 겨울 산행의 위험도 걱정되었다. 그냥 포기하고 가까운 데서 볼까 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올라왔다.
올레길에서 만나 한라산에 동행하기로 한 대학생 K는 단호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제주도에 여행 온 이 친구는, 자기는 한라산 야간산행을 하려고 제주도에 온 거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올라가겠다는 거다. 해를 못 봐도 좋단다. 대피소까지만 가도 좋단다. 산에 가는 게 목표였으니 자기는 올라가기만 하면 만족한다고 했다. 눈길 산행의 고생쯤은 K에게는 문제가 안 되었다.
K의 의지가 하도 확고하여 나도 함께 가기로 했다. 5.16도로로 가긴 글렀으니 성판악 코스는 포기하고 서귀포에서 버스로 제주시까지 가서 거기서 관음사 가는 택시를 알아보자 싶었다. 저녁에 짐을 꾸려 일찌감치 출발했다. 보목리에서 서귀포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택시에서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기사분이 관음사까지 갈 수 있는 친구를 알아봐 주었다. 자기 차는 스노우타이어가 아니어서 안 된다면서. 친구 분에게 4만 원을 주기로 하고 산업도로로 관음사까지 가기로 했다.
밤길은 평온했으나 한라산 근처로 접어드니 길이 살짝 얼어있더니 올라갈수록 빙판이 심해졌다. 그래도 강원도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이런 길을 못 올라간다니 이해가 안 갔다. 제주가 따뜻해서 눈길 운전이 익숙치 않아서 그럴까. 택시 기사는 길이 너무 위험하다고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고 결국 만 원을 더 얹어주고 관음사 입구에 내렸다.
내리고 보니 절로 들어가는 커다란 일주문 말고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국립공원 사무실은 대체 어디 있지?’ 하다가 절 안으로 들어가는 분을 만났다. 등산로를 물어보니 여기가 아니란다. 한 삼십 분 더 걸어가야 국립공원 사무실이 나온단다. 순간 이 밤중에 아무 대책 없이 산길에 우리를 내려놓고 간 기사 분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그 분도 공원 입구를 잘 몰랐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여기에 몇 년 만에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관음사라고 하면 당연히 관음사 등산로라고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절 입구에 우리를 내려놓고 간 거다.
다행히 시간은 넉넉했다. 우리는 가로등은 당연히 없고,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K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오래지 않아 국립공원 사무실과 고대하던 매점이 나타났다. 시간은 밤 10시, 등산로 개방 시간은 12시이므로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다.
매점에 들어서니 등산객은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초행길인데 우리끼리 어떻게 갈지 걱정이 마구 몰려왔다. K가 내 얼굴을 보더니 진정하라고 한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바깥에 차 소리가 나더니 한 중년의 등산객이 매점 문을 열고 들어선다. 공항에서 막 오는 길이란다. 우리를 보더니 그런 차림으론 못 올라간다고, 아이젠과 스패츠를 사라고 하셨다. 그 분은 한라산에 숱하게 왔을 뿐 아니라 눈길 야간산행도 많이 한 전문가였다. 이 분 따라가면 되겠다 싶어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11시가 넘자 할아버지 한 분이 도착했다. 관리사무실에 전화해보니 등산객 세 명이 와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같이 출발하면 되겠다 싶어서 급하게 짐 싸서 오셨다 한다. 제주시에 살고 계시단다.
이렇게 해서 서로 모르는 네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밤 12시에 출발했으니 이미 새해 첫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얗게 쌓인 눈 때문에 칠흑 같이 어둔 밤인데도 산이 밝다. 우리들의 마음도 그 무엇보다 밝았다. 12월 31일 하루 종일, 폭설로 삼각봉대피소까지만 갈 수 있다고 했는데, 밤 10시를 기해서 정상까지 등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무슨 말로도 다 표현하길 없는 고요한 산속, 쌓인 눈이 그 침묵의 깊이를 더해주는 시간이었다. 눈길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이 산행을 위해 1박 2일 시간을 내어 공항에서 날아왔다는 중년의 남자 분은 요즘 경기가 하도 안 좋고 힘들어서 무언가 희망을 하나 건져보려고 한라산에 왔다고 했다. 동행한 또 한 분의 할아버지는 지금 이 나이에도 정상까지 갈 수 있을지 자신을 시험해 보고도 싶고, 자녀들 잘 되라는 기원도 하려고 산행에 나섰다고 하셨다. 이 분들께 일출 산행은 마음 깊은 곳의 자연스러운 종교적 열망으로 보였다. 마음이 고운 이들이었다. 흰 눈 때문일까, 내 마음도 덩달아 경건해졌다. 세속은 저만치 물러나고, 그저 이 길을 걷는 것, 새해 첫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었다.
출발할 때는 넷이었는데 가면서 사람들을 더 만났다. 우리 걸음이 느려서인지 뒤에 출발한 이들이 더러 우리를 앞서갔다. 산길을 오르며 열 몇 사람 정도 만난 것 같다. 산행 초입부에 있는 계단이 완전히 얼어붙어서 가파른 빙판이 되는 바람에 장비를 갖추지 못한 몇 사람은 거기서 포기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예전에 갔던 성판악 코스가 완만하고 지루했던데 반해 관음사 코스는 길이 오르락내리락 다채로운데다가 큰 계곡을 가로지르는 웅장한 맛이 있었다. 게다가 내 생애 이런 눈을 본 적이 없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오르면서 7~8천미터급의 설산을 보았지만, 그것과는 종류가 다른 아름다움이 한라산에 있었다. 히말라야는 고도가 높은 곳은 어떤 생명체도 살지 못하며 거대한 바위산을 눈이 덮고 있다. 반면에 여기 한라산은 온갖 풀과 나무 위로 눈이 쌓여 산 전체가 특별한 조각품을 이루고 있었고, 생명력에 빛나는 신성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무튼 그 밤, 한라산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해도 전혀 지나침이 없었다.
네 시간여 만에 삼각봉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피소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신비한 ‘열기’ 때문이었다. 한 오십 명쯤 되었을까. 폭설로 산행이 어려울까봐 미리 저녁에 올라와서 여기서 밤새 죽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등산객들 대부분이 성판악을 통해 백록담으로 향하기 때문에 이 밤에 험한 관음사 코스를 택한 사람은 알파니스트 스타일의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내뿜는 건강하고 야생적인 에너지에 반했다. 미리 와 있던 분들이 따끈한 차를 권한다.
걸어올 때는 추운 줄 몰랐는데, 대피소에 가만히 있으니 온몸에 부들부들 한기가 몰려온다. 나는 너무 추워서 계속 제자리걸음을 했다. K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존다. 그 때 한 노인장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칠십대는 족히 되어 보였는데 눈빛이 맑고 형형했다. 제주 분이라고 했다. 이 추위 속에 반바지 차림이라 모두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종아리가 진짜 무쇠 같았다.
어쩜 이렇게 건강하시냐고 했더니, 대한민국 안 걸어본 데가 없다고 하셨다. 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부산에서 서울까지 우리 땅을 ‘X’ 자로 횡단했고, 또 남해안, 서해안, 동해안, 휴전선까지 ‘ㅁ’ 자로도 걸었다고 했다. 제주도를 일주해 보라고, 특히 산록도로가 너무 좋다고 걸어보라 하셨다. 대단한 어르신이었다.
왜 그렇게 걸으시냐고 여쭤 보았다.
고통을 즐기는 거지.
“네?”하고 내가 반문하자 이렇게 대답하신다. 이 정도는 능히 이겨내야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래야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생긴다 하셨다. 보통 어르신이 아니구나 했다.
슬슬 출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대피소 안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도 일어서지 않는다. 듣자하니 저 아래에서 여기 대피소까지는 서울 모 산악회에서 눈 위로 길을 내었고, 여기서부터 정상까지는 그냥 눈밭이라 했다. 앞장서 가면 힘드니까 다들 먼저 가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어떤 아주머니가 젊은 청년을 보고 삽 들고 먼저 가라고 농을 던졌다.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다들 꼼짝 않고 있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주섬주섬 일어서자, 옆의 아저씨가 귀띔을 한다. 뒤에 묻어가는 게 편하니 이따 가라고.
일출 시간은 다가오고 결국 성질 급한 이들이 하나 둘 먼저 출발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라 길을 나섰다. 눈이 무릎까지 쑥쑥 빠지는 길,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들었다. 하지만 경치는 지금껏 온 길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장관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은 더 많아졌다. 앞으로 평생 눈을 못 봐도 한이 없을 만큼 눈 천지였다.
앞선 사람의 등에 달린 배낭을 보며 묵묵히 걷는데 문득 한 생각이 스친다. 눈길도 아름답지만, 그 위를 걸어가는 사람이 더욱 아름답다고. 이 순간 함께 걷고 있는 낯모를 이들, 이름은 물론이고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로부터 깊은 동질감을 느꼈고, 그들의 뒷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 밤이었다.
아침 6시 반, 밤새 걸은 끝에 드디어 1950미터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보니 수많은 인파가 우리보다 먼저 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천 몇 백 명은 족히 될 것 같았다. 모두 성판악 쪽으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관음사 방면은 한적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와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다들 방한복으로 온몸을 중무장하고 눈만 밖으로 내어놓은 채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이 짙어 일출을 보기는 힘들 듯했다. 백록담 표지목 위에도 쌓인 눈이 얼어붙어 있었고 내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설국이었다. 속눈썹에 어린 습기까지 얼어붙어 눈을 깜박일 때마다 거북했다.
이 와중에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은 분이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서 자리를 깔고 고사를 지내는 분이었다. 자리 위에는 떡을 비롯한 간소한 음식과 돼지머리 대신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커다란 돼지 저금통이 놓여 있었다. 그분이 어떤 소망을 기원하는지는 모르지만, 새해 첫날 1950미터 산꼭대기에서 제를 올리는 정성이라면 하늘도 감응해서 답해줄 것 같았다.
한 30분쯤 추위에 떨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산 위로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람은 몇 번 거듭해서 몰아치더니 갑자기 동쪽 하늘 저편 하얀 구름과 안개 사이로 붉은 빛이 나타난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가 났다.
바람은 더 힘차게 몰아쳐서 구름을 흩어버리고 드디어 태양 한 조각이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람들은 이제 너나 할 것 없이 “와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힘찬 함성이 한라산 정상에 메아리쳤다. 해는 점점 솟아오르고 감격에 찬 사람들의 얼굴도 햇살을 받아 점점 붉어졌다.
내 생애 최고의 해님이었다. 붉은 불덩어리가 산 위로 떠올라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천지창조의 순간이 있다면 지금과 같으리라. 구름이 햇빛을 반사해서 온 하늘이 붉은 빛으로 가득했고 아래로는 겹겹의 구름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말로는 표현 못할 장관이었다. 몇몇 사람은 감동해서 손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다. 우리 모두는 태양신의 재림에 환호하는 원시 부족민이 되어 있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햇빛은 붉은 빛에서 노란 빛으로, 다시 하얀 빛으로 바뀌었다. 하늘도 붉은 빛에서 청명한 푸른 빛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하나둘 하산하기 시작했다. 일출을 보고 내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햇살처럼 환했다. 우리 일행도 관음사 방면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날이 밝을 때 보는 풍경은 또 달랐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투명하게 얼어붙었고 그 위로 햇살이 비치자 산 전체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내려오면서 한 가지 선물을 더 받았다. 우리 팀의 등산을 이끌어주신 분이 아침거리를 준비해 오셨다. 1월 1일 한라산에서 일출을 보고 떡국까지 먹는 행운이 찾아오다니! 동행 네 사람은 삼각봉대피소 밖 한쪽 귀퉁이에 코펠을 놓고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속에 황송하게 떡국을 먹었다.
산을 다 내려와서 송년의 밤과 새해 첫아침을 함께 보낸 우리 네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팀을 이끌어준 분은 공항으로, 할아버지는 제주시로, K는 추자도로, 나는 서귀포로 향했다. 가는 길은 서로 달랐지만 우리 가슴 속에는 같은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