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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Sep 12. 2019

관동별곡은 과장이 아니었다/ 금강산

내게 특별한 여행지 (16), 2004년 9월

  



금강산에서 꿈같은 일박 이일을 보냈다. 육로 관광이 시작된 지 일 년여 만에 드디어 북한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세상 어떤 땅보다도 더 멀어 보였던 그곳은 그렇게 지척에 있었다. 먼 것은 인간의 마음이지 땅이 아니었다.

  

새벽 여섯 시, 고성 금강산콘도에서 관광증을 받은 우리 가족은 민통선을 지나 통일전망대 근처에 있는 동해선 출입국사무소에서 수속을 밟고 배정 받은 버스에 올랐다. 비무장지대의 철조망과 그 너머 북녘 땅을 눈앞에 두고 마음은 다소 긴장되었다.

  

출발 전에 직원 분으로부터 여행에 필요한 설명을 들었다. 북한 사람들은 남북이 하나의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광지구 내에서는 ‘북한, 남한’이란 용어 대신에 ‘북측, 남측’이란 용어를 사용해달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차 안에서는 일체의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고 했다. 나는 마음에 고이 담아가기로 했다.

  

드디어 출발하여 비무장지대에 접어들었다. 군용도로를 따라 가며 보이는 ‘지뢰 위험’이라는 표지판이 여기서 죽어간 수많은 넋들과 여전히 생생한 분단의 아픔을 환기시켰다.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각각 2km씩 두게 되어 있지만, 북측이 1.2km를 내려오고 남측이 0.8km를 올라가는 바람에 실제로는 2km라고 한다.

  

버스는 금세 남방한계선을 지났고, 군사분계선을 알리는 녹슨 철 표지판을 지나 드디어 북측 비무장지대에 들어섰다. 북방한계선을 통과하자 진한 밤색 군복을 입은 북측 군인들이 나타났다. 버스는 잠시 정차했고 인민군 장교 두 명이 올라와서 인원 점검을 했다. 사뭇 떨리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몇 겹의 장벽을 통과해야 했지만, 우리가 가는 길옆으로 철길은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동해북부선’이 이미 연결되어 있었고 철로 주변으로 보수공사를 하는 북측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철로는 원산까지 연결되어 드넓은 러시아 땅과 만난다. 냉전 세력이 아직까지 한반도에서 큰 소리를 내고 있는 동안에도, 철길은 소리 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역사도 그렇게 전진하고 있었다.

  

길옆으로 보이는 풍경은 다소 이국적이었다. 약간 흐린 하늘 아래 낙타봉(구선봉)을 비롯해서 연이은 바위산들과 나무가 전혀 없는 주변 야산의 모습은 삭막해 보였다. 6·25 때 치열한 전투로 나무가 모두 불탔다고도 하고 여기가 해안이다 보니 군사적 목적에서 나무를 모두 베어서 그리 되었다고도 한다.

  

황량한 바위산들을 벗어난 버스는 남강 다리를 지나 계속 달렸다. 남강은 남에서 북으로 흘러들어 동해로 빠져나간다. 관광도로 옆으로는 연두색 철책이 있는데 관광지역과 북측 마을의 경계였다. 우리는 그 안으로만 다닐 수 있다. 강물은 남과 북이 없이 흐르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그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길이 열린 것만 해도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철책 너머로 북측 마을도 보이고, 북측 사람들이 다니는 도로도 보였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가는 북측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몇 십 년 전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전해오는 상팔담     


출발한 지 약 한 시간 만에 우리는 고성항(장전항)에 있는 북측 출입국 사무소에 도착했다. ‘반갑습니다’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고 내 마음도 한결 푸근해졌다. 사무소 가까이 호텔 해금강과 펜션 타운이 보였다. 수속을 밟고 온정각으로 향했다.

  

온정각은 금강산 관광 지구의 센터 구실을 하는 곳이었다. 식당 예약은 물론이고 코스 관광을 위한 셔틀 버스가 모두 온정각에서 출발한다. 아침을 못 먹었던 터라 우리는 온정각 식당에서 간단히 우동을 들고는 곧바로 구룡연으로 가는 셔틀 버스에 올랐다.

  

구룡연 코스는 금강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다. 왕복 네 시간의 완만한 코스였다. 설악산 계곡과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들지만 훨씬 맑고 깨끗하다. 금강문을 통과하면 옥류동 계곡과 연주담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산의 담과 소는 진한 옥색빛을 띠고 있는데, 선녀가 목욕을 하다 옥가락지를 빠트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물색이 얼마나 푸르렀는지 그냥 물에 첨벙 뛰어들고만 싶었다. 아버지는 “한번 뛰어들고 벌금 백 달러 낼까”하며 농담을 하셨다.



옥류동계곡
상팔담


계곡을 지나 구룡대 정상에 오르자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해졌다. 산을 내려가기가 싫었다. 주위로는 겹겹의 바위산들이 둘러쌌고 저 아래로는 팔선녀가 목욕했다는 ‘상팔담’이 보인다. 차례로 이어지는 여덟 개 담소의 신비로움은 과연 선녀가 목욕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기에 충분했다. 구슬처럼 맑고 깨끗해서 천상의 아름다움을 함뿍 맛보게 하는 곳이었다. 네 번째 담소에서 나무꾼이 선녀 옷을 훔쳤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구룡대를 내려와서 구룡폭포를 보기 위해 관폭정으로 갔다. 상팔담을 지난 물이 떨어져 내린 폭포가 구룡폭포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곳. 물이 많았다면 장관이었으리라. 산길을 다 내려와 북측 식당 목란관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먹었다.    


금강산이 매력적인 까닭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세의 아름다움 때문이지만,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된 까닭도 크다. 산에서 우리는 계곡물에 손을 씻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나뭇잎 하나, 도토리 하나도 가져올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 시작하면 자연이 오염되는 건 금방일 텐데, 이런 강력한 규제가 있어서 이 산이 천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구룡연에서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두 시에 출발하는 삼일포, 해금강 코스는 생략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네 시 반에 있을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기다리며 온정각에서 휴식을 취했다.

  

나는 온정각 맞은편에 있는 정몽헌 회장 추모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추모비에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헌사가 쓰여 있었다.      


여기 조선 땅의 숨결이 맥동치는 곳

금강에 고이 잠들다.

아버지 아산 정주영의 유훈을 이어

세계사의 모든 갈등을 한 몸에 불사르며

남북 화해의 새로운 마당을 열었다.

그의 혼과 백

영원히 하나 된 민족의 동산에서 춤추리.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펼쳐진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서커스는 기대 이상이었다. 30달러라는 입장료가 매우 싸다고 생각될 만큼 정말 멋진 공연이었다. 북한에서는 세계대회에서 수상하게 되면 인민배우, 공훈배우로 승격되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장 ․ 차관급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분들의 환상적인 공연이 한 시간 반 동안 우리 눈을 사로잡았다. 공연 마지막 인사는 ‘다시 만납시다’ 였다.


온정각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온천으로 향했다. 물이 무척 매끄럽고 좋았다. 날이 밝을 때는 노천 온천에서 금강산 봉우리들이 또렷이 보인다고 한다. 계곡에 뛰어들지 못한 대신에 이곳에서 온천욕을 하며 잠시 선녀가 된 기분에 젖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렇게 바쁜 첫날 일정을 마치고 나니 하루가 저물었다.      



신선이 하늘로 오를 듯한 천선대     

  

다음날, 호텔 해금강에서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야산 너머로는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내가 북한 땅에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는 평소 여행 습관대로 급하게 카메라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바닷가로 걸어 나가서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호텔 앞을 몇 걸음 걷자마자 제지를 당했고 그제서야 주의 사항을 떠올렸다. 고성항은 군사 지역이라 호텔을 제외한 근처 어떤 곳에도 갈 수 없고 사진도 찍을 수 없다.

  

아침 식사 후에 만물상으로 떠나는 셔틀 버스에 올랐다. 만물상을 보지 않고는 금강산을 논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기에 기대가 컸다. 날씨는 또 얼마나 좋았는지 가끔 구름이 한 자락씩 오가는 빛나는 가을날이었다.

  

12킬로미터쯤 되는 산길을 구비구비 버스로 들어갔는데, 원시림이 느껴지는 울창한 솔숲에 먼저 반했다. 잔가지가 없이 죽죽 뻗은 소나무들은 키가 20미터나 되며 평균 수령도 오륙백 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금강산의 소나무를 ‘미인송’이라고 부른다. 참말이지 내려서 한없이 걷고 싶은 길이었다.

  

간단한 설명을 듣고 산행을 시작했다. 만물상 코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을 게 없을 만큼 아름다운 길이었다. 아침 햇살이 비친 가을산의 모습과 신선한 공기에 다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귀면암과 삼선암을 지나며 빛과 그림자와 바위와 하늘이 함께 만들어내는 그림에 경탄하며 걸었다. 산 정상 부근에는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고 산 전체가 신이 빚은 아름다운 조각이었다.



바위는 고난의 역사를 알고 있을까

  

우리는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의 망양대에 먼저 올랐는데 망양대는 올 9월부터 개방된 코스라고 한다. 망양대의 제1망에서 제3망까지 오르는 동안 푸른 동해와 하얀 백사장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금강산에서 동해의 푸른 물을 바라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바다는 묻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좁은 땅에서 좁은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나는 ‘홀로아리랑’의 노랫말 한 소절을 바다로 띄워 보냈다.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도 동해 가는데,

우리네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산행 중에는 중요한 길목마다 안내해 주는 북측 분들이 있어 설명도 듣고 대화도 나누었다. 그분들은 같이 사진을 찍는 것은 대개 거절한다. 그냥 헤어지기는 못내 아쉬워 나와 동생은 그분들의 팔만 나오게 같이 악수하는 장면을 찍으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작은 만남의 순간이 우리 마음에 새로운 길을 놓고 있었다.

  

망양대를 내려와 다시 천선대로 오르는 길은 무척 가팔랐다. 깎아지를 듯한 바위 위로 설치된 철계단을 오르면 기암절벽 만물상이 차츰 가깝게 다가온다. 세상의 모든 형상이 다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만물상!

  

천선대 정상에 서서 바라본 동서남북의 경치는 숨 막힐 듯이 아름다웠다. 사진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으며 눈으로 보는 풍경이 훨씬 아름답다. 남한에는 이런 산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그동안 정철의 관동별곡을 과장된 수사라고 생각해 왔는데, 천선대에 올라 생각이 바뀌었다. 그만큼 예쁘고 아기자기하면서 또한 웅장했다. 말 그대로 선경이었다. 신선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사뿐히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날아다닐 것만 같았다. 나는 내 주위를 온통 휘감은 가을 금강산의 기운에 깊이 감동했다.


세상 모든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만물상

  

천선대를 내려와 하늘문을 지나서 지팡이를 잊어버릴 만큼 물맛이 달다는 망장천에서 목을 축이고 산을 내려왔다. 어쩌다 보니 우리 가족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또 꼴찌가 되고 말았다. 왕복 세 시간 코스를 쉬엄쉬엄 다섯 시간 만에 내려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동생은 우리가 북측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김일성 교시문 앞에서 사진 찍은 것 등의 행위가 죄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헌데 이 법을 목숨 걸고 지키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에는 없어질 거라고 내가 말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몇 걸음 앞서 걷던 북측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보며 “과연 없어질까요?”하고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밝게 대답했다.     



변치 않는 굳은 마음, 금강     

  

산행을 마치니 오후 두 시가 다 되었다. 냉면을 좋아하는 동생 때문에 금강산 호텔에서 점심으로 또 냉면을 먹었다. 북측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였다. 목란관 냉면이 깔끔한 맛이었다면, 금강산 호텔의 냉면은 김치가 들어가 매콤하게 맛있었다. 온정각 식당보다는 북측 식당의 음식이 더 별미였다. 호텔 입구의 펄럭이는 한반도기를 뒤로 하고 다시 온정각에 모였다.

  

온정각에서 남으로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참으로 많은 생각이 오갔다. 어머니는 내친 김에 이 길로 백두산까지 가기를, 여기가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를 바라셨다. 아버지는 포항쯤에서 동해남부선을 타고 동해안을 따라 죽 올라오다가 고성에서 동해북부선으로 갈아타고 여기에 오면 얼마나 좋겠냐고 하셨다. 나는 금강산의 사계를 다 만나보고 싶었다. 곧 개성으로 가는 길도 열린다고 한다.

  

시간이 있다면 이박삼일 일정이 더 여유롭고 좋을 것 같다. 산행은 날씨가 좌우한다. 늦여름에 금강산을 찾은 내 친구는 천선대에서 짙은 구름 때문에 만물상은 물론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늘이 허락한다면 절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노래한 곳은 내금강이었다. 우리는 외금강의 일부를 보고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더 깊이 들어가 금강산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봉인 비로봉에 올라 일만 이천 봉우리를 굽어볼 날은 언제일까. 해금강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할 날은….

  

버스에 올라 다시 비무장지대로 향했다. 남강 주위로는 자연 습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습지 위로는 풀과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서쪽에서 비치는 저녁 햇살을 받아 엷게 반짝였다. 소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러나 저 언덕 위 움막 아래에 위장한 채 버티고 선 미사일과 탱크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아픈 현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차는 군사분계선을 통과했다. 남방한계선을 넘어 친근한 우리 군인들의 얼굴이 나타나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 한 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참으로 가깝고도 먼 곳이 북녘 땅이었다. 저녁 여섯 시, 우리는 남쪽 지역에 돌아왔다.

  

이틀이 아니라 한 일주일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반가움과 기쁨, 그리고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한 특별한 만남. 금강산 여행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철길은 그 희망의 증거였다. 그 길을 따라 우리 마음도 자유로이 날아갈 날이 오리라.

  

‘금강(金剛)’이란 불교식 이름으로 너무도 굳세고 단단하여 불변의 성질을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진리를 향한 변하지 않는 굳은 마음, 금강.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우리들의 희망과 의지도 그만큼 굳세기를 빈다.


@2004



온정각에서 새 날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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