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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Sep 14. 2019

촛불을 들다/ 서울 광화문광장

내게 특별한 여행지 (17),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 광장은 거대한 축제장이었다. 시청역에서 광장으로 나오는 모든 길이 인파로 가득했다. 출입구마다 색색의 깃발을 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고 환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헤쳐서 숙소로 잡은 남대문 근처의 호텔 프레이저플레이스에 도착했다. 프레이저플레이스 앞에서는 마침 농민들의 한마당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거리 행사를 마친 농민들이 각 지역별로 바닥에 둥글게 자리를 잡고 준비해온 음식과 막걸리로 요기를 하고 있었다. 대학 엠티 같은 분위기였다. 호텔 직원은 지금까지 숱한 시위를 보았지만, 이렇게 호텔 바로 앞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찬 것은 처음 본다고 했다. 

  

고속도로가 막혀 친구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했다. 11월 12일 민중총궐기 및 3차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상경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온갖 종류의 단체와 노조, 대학생, 일반 시민들이 속속 도착했다. 각양각생의 깃발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움이었지만, 금단의 선을 넘어 드넓은 차로를 걸어가며 느낀 해방감은 실로 대단했다. 

  

저녁이 되자 더 많은 시민들이 합류했다. 내 생애 그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광화문에서 남대문 근처까지 주 도로뿐 아니라 샛길까지 전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일대의 까페와 음식점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언론에서는 백만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백만은 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닌, 기쁨이었다. 광장은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커다란 기쁨의 에너지로 들끓고 있었다. 누가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기쁨과 연대의 에너지가 무수한 촛불과 함께 그 밤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 촛불시민들의 행렬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광화문 일대에 자리 잡은 고층 빌딩들이었다. 그 날의 광화문광장은 정확하게 두 개의 권력이 대비를 이루는 공간이었다. 한쪽에는 정부종합청사, 미국대사관을 위시한 각국 대사관들, 조선일보, 동아일보, 연합뉴스 등 각종 언론사들이 버티고 있었고, 또 한쪽에는 촛불을 든 평범한 시민들이 있었다. 

  

한국을 움직이는 권력의 핵심이 모여 있는 광화문에 백만 개의 촛불이 켜진 날, 나는 알았다. 지금까지 백만 시민의 목소리보다 그 빌딩이 상징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힘이 더 강했구나. 수백만의 외침에도 그들은 어쩌면 끄떡도 하지 않겠구나. 정권이 바뀌어도 그들의 권력은 계속 유지되겠구나.  

  

내 마음엔 다음과 같은 소망이 피어올랐다. 여기 광화문광장에서 더도 말고 딱 일주일만, 세상을 멈추면 좋겠다고. 일주일 동안 시민들이 이 공간을 점령하고 축제를 즐겼으면 좋겠다고. 박근혜뿐 아니라 그 일당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물러날 때까지 도로와 광장을 점거하고 함께 먹고 마시고 놀면서 우리는 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만드는 자이며 법을 만드는 우리가 주인임을 확실히 각인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면 세상이 조금은 더 빨리 바뀔 것 같았다. 

  

밤 12시, 광장을 비워주어야 할 시간이 왔다. 시민들은 돌아가기 시작했고 상당수는 청와대 근처로 이동하여 ‘박근혜 퇴진’을 계속 외쳤다. 촛불이 점령했던 광화문 광장의 도로에는 다시 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광화문은 다시 그들의 것으로 돌아갔다. 그 일상적인 모습이 낯설고 이상하게 여겨지는 밤이었다. 

  

나는 절망도 희망도 품지 않았고,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았다. 미래가 누구의 것일지는 불확실했다. 다만 가슴에 고이 담은 건 11월 12일의 광화문광장, 시민들의 순수한 열망으로 빛나던 얼굴, 촛불을 밝힌 고귀한 손길, 어둠을 가르던 당당한 외침, 친구와 손 꼭 잡고 행진한 길의 모든 풍경이었다. 잠깐이지만 내가 바라던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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