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특별한 여행지 (18), 2015년 2월
서울 답사의 핵심 루트는 광화문광장에서 경복궁을 거쳐 창덕궁, 종묘까지 옛 궁궐을 보는 코스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인상적인 곳은 따로 있으니, 광화문광장의 덕수궁에서 시작해서 배재학당과 경교장을 지나 사대문 밖 서대문형무소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우리 근세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다.
덕수궁이 있는 정동 일대는 구한말에 외교관과 선교사를 위시한 서양인들의 공간으로 변모해간다. 각국 공사관이 대한제국의 황궁인 덕수궁 인근에 자리 잡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자리가 덕수궁 뒤편이었다. 영국 대사관은 백여 년 전 영국 공사관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역시 덕수궁 바로 옆이고 성공회성당도 그 자리에 있다. 덕수궁에 오면 고종황제 시기의 ‘아관파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실감이 나고, 당시 외세가 왕의 바로 곁에 딱 붙어서 어떤 식으로 내정에 간섭하려 했는지 절로 짐작이 간다.
원래 덕수궁은 지금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고 한다. 덕수궁 일대의 부속 건물을 다 허물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각국 공사관이었다. 그때와는 조금씩 위치가 바뀌었지만 지금도 덕수궁 주변에는 외국 대사관이 많다. 덕수궁 바로 건너편에는 당시 미국 공사관이 현재 미국 대사관저로 쓰이고 있고, 몇 블럭 더 들어가면 일본대사관도 있다.
덕수궁은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는데, 임진왜란 시에 선조가 임시행궁으로 사용하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잊혀진 장소가 되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된 적이 있고, 고종이 아관파천 후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십 년간 대한제국의 황궁 역할을 했다.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으나 고종이 폐위된 후에도 계속 이곳에 거처하면서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내가 이번에 새로 방문한 곳은 덕수궁 중명전이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라는 우당 이회영 일가에 관한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중명전은 덕수궁 바깥에 있었다. 덕수궁을 나와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정동극장을 지나니 붉은 벽돌로 지은 중명전이 나타났다. 1901년에 건축된 근대식 건물로 1층과 2층을 연결한 기둥과 아치가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중명전(重明殿)’은 ‘광명이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데 이름과는 정반대로 이곳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통탄할 일이 일어난 장소다. 1905년 을사늑약이 바로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1층 상설 전시실에는 을사늑약의 장면이 재현되어 있었다. 조선의 중신들은 목숨 걸고 일본과 맞서기는커녕 자진해서 조약에 서명하여 역적이 되었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백 년 넘게 전개되면서 나라의 요직은 이미 탐관오리들이 장악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은 전쟁을 하는 대신 조선의 관리들을 손에 넣는 손쉬운 방법을 찾았고, 그렇게 세계사에 유래가 드문 부끄러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양국 사이에 격전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이완용이 20억을 받은 대가로 나라를 그대로 넘겨버렸으니 당시 백성들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말 그대로 ‘멘붕’이었을 것이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정운현)’에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근택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나라를 팔아먹는 조약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근택이 가족들에게 이제 우리는 평생 권세를 누릴 거라 말한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쾅!” 하고 식칼로 도마를 후려치는 소리가 나더니 한 계집종이 “이 집 주인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 하며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내용으로 당시 민중들의 애끓는 심정을 전해주는 일화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장소에서 2015년, 이회영 일가의 전시가 열렸다. 조선의 양반들이 나라를 넘긴 그 시점에 조선의 대표적 명문가인 이회영 선생의 집안이 국권 회복에 앞장섰기 때문이리라. 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그를 ‘독립운동의 초석을 마련한 지도자’라고 평가한다. 을사늑약 후 이회영 선생은 을사오적의 암살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뒤이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하여 1907년, 러시아를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한 헤이그 특사의 머나먼 여정이 시작된다. 을사늑약이 무효인 이유는 첫째, 일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했고, 둘째, 광무황제(고종)는 늑약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셋째, 위임 ․ 조인 ․ 비준이라는 조약체결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넷째, 국제법적인 조약의 형식도 갖추지 않았으며, 다섯째, 한민족 전체의 의사와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헤이그 특사는 결국 실패하고 이를 윤허했던 고종은 일본에 의해 폐위되어 중명전에 유폐된다. 이에 이회영 선생은 고종 망명 계획을 세우지만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항복의 후손으로 조선 최고의 가문이었던 우당 이회영 선생의 6형제, ‘건석철회시호(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는 전 재산을 팔아 서간도에 이주하여 터를 잡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다.
항일투쟁가 김산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조선 청년들은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어 몸과 마음이 뜨거웠다고 한다. 당시 15세였던 그는 입학 최저 연령이 18세여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그의 기나긴 순례여행의 이야기를 들은 학교 측의 배려로 특별히 3개월 훈련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할 때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들은 청산리대첩 등에서 맹활약을 했다. 이후 이회영 선생은 북경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1932년,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새로운 무장독립운동을 개척하기 위해 만주로 떠났으나 밀정의 고발로 일경에 체포되어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한다. 광복 후 살아 돌아온 사람은 6형제 중 단 한 명, 이시영 선생뿐이었다.
난 그림을 잘 그려서 그림을 그려 독립운동자금을 썼다는 이회영 선생, 그는 일제의 요시찰을 받는 인물이었기에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 모든 기록을 그때그때 없앴고 그래서 편지 한 장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회영 선생의 아내 이은숙 여사가 그 고단했던 여정을 ‘서간도시종기’란 책으로 펴냈는데 철저히 기억에 의존해 썼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이 남긴 것은 한 장의 사진뿐이었다. 가로 4.5cm, 세로 6.8cm의 작은 사진 한 장, 난잎 그림 몇 장, 그리고 순국할 때 입으셨다는 옷 한 벌이 그가 남긴 전부이다.
다른 항일투쟁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시실에는 신흥무관학교 생도 452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82년 만에 처음으로 새겨진 이름이라 한다. 아직 찾지 못한 3천여 명의 이름은 그곳에 빈 칸으로 남아 있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그 어둠을 거슬러간 사람들의 존재가 별처럼 빛난다. 조국 강토와 그 안의 모든 것을 팔아넘기고 거대한 토지와 작위를 하사받은 사람이 있었다. 반면에 가진 것을 모두 바치고 단 한 장의 사진만을 남긴 이회영 선생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세 글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스러져간 신흥무관학교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이 상반된 삶의 길 앞에서 우리 시대가 조금 더 명징한 답을 내어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을 다 바쳐서 남긴 것 하나 없는 분들을 충분히 흠모하지 못한 세월이었다.
우당 6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해방을 맞은 성재 이시영 선생만 해도 일가가 고난을 면치 못했다. 종로구 일대의 2만 평의 땅을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던 선생은 78세의 노구로 조국에 돌아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내지만 1951년 6.25 전쟁 중에 벌어진 ‘국민방위군 사건’에 분노하여 국민에게 전하는 글을 발표하고 사임한다. 탐관오리만 날뛰는 현실에서 자신이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음을 통절하게 사과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선생은 이승만에 맞서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선생이 공직에서 물러난 후 가족들은 전쟁통에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4남 2녀 중 셋째와 넷째 아들은 이미 만주에서 굶어죽었고, 둘째 아들은 선생보다 몇 달 앞서서 6.25전쟁 중에 병사했다. 선생의 손자들은 모두 경기고 등 명문고를 졸업했지만 가난으로 인해 대학에 진학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앞서 언급했던 을사오적 이근택의 증손자들이 국립대 총장(이상우)과 교수(이철우)를 지낸 것과 대비된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사람들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찾은 사실과 의미만큼 역사는 진전하기 때문이다. 공의를 위해 애쓴 분들의 이름을 남김없이 되찾고 그 이름이 역사에 제대로 자리매김 될 때, 나라를 온전히 되찾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전시장을 나서며 우당 6형제의 이름 ‘건석철회시호’가 마음에 무겁게 박혔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