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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Sep 21. 2019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 파주 도라산역

내게 특별한 여행지 (20), 2006년 8월



잠시 후 이 열차는 종착역, 서울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서울역에서 내리시는 손님들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역에 도착할 때면 늘 나오는 방송입니다. ‘종착역’이라는 말이 뭔가 어색하다고 느낄 새도 없이 열차는 서울역에 정차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길로 흩어집니다. 그렇게 내 기억 속의 서울역은 언제나 모든 길의 끝이었습니다. 더는 갈 수 없는 곳. 

  

하지만 이 날은 달랐습니다. 기차는 서울역을 출발해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목적지는 휴전선 이전의 마지막 역, 서울에서 북쪽으로 56km 떨어진 파주 도라산역입니다. 이곳에서 ‘통일열차음악회’가 열리게 되었고 이 행사를 위해 특별 관광열차가 편성되었습니다. 아이, 어른, 학생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북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서울을 빠져나온 기차는 어느새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들어섰는지 간간이 철망이 보입니다. 군사보호구역입니다. 나즈막한 야산, 남한강 물줄기, 여느 곳과 다를 바 없는 산하였지만 모든 풍경이 새로운 까닭은 이곳이 금단의 땅이기 때문이겠지요. 서울역에서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한 시간 좀 지나서 열차는 도라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역사 앞에는 무장한 헌병들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라고 벽에 커다랗게 적힌 문구가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도라산역은 개성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로 이어지는 ‘경의선’의 출발점이었어요.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끊어진 경의선을 잇기로 남북이 합의함에 따라 이곳 도라산역이 세워졌습니다. 

  

역사 안에는 ‘평양 방면 타는 곳’이라고 쓰인 출입구가 있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부산 방면, 서울 방면은 익숙한데, ‘평양 방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낯설고 신기합니다. 



  


대학 신입생 때 ‘서울에서 평양까지’란 노래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노랫말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오 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 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 가

우리 형제 우리 민족 평양만 왜 못 가 (후략)              

  

이 노래는 아이슬란드만큼이나 멀어보였던 평양이 실은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일깨워준 노래입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 바로 눈앞에서 ‘평양 방면 타는 곳’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서울에서 261km, 도라산역에서 205km, 차로 두세 시간이면 닿는 곳을 세상에서 가장 멀고 외진 장소로 만든 것이 분단이었습니다. 

  

한 시간여 진행된 음악회는 금방 끝이 나고 도라산역에서 허락된 우리들의 시간도 다 되었습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하는 사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남쪽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가 임진강역에 정차했을 때는 여름 소나기가 흩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임진각 ‘자유의 다리’까지 걸어갔습니다. 이곳도 처음 와보는 곳입니다. 휴전선으로 끊어진 다리 앞에는 이산가족들의 소망을 담은 색색의 리본이 펄럭입니다. 가족과 고향산천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리본마다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 아픈 염원을 뒤로 하고 마지막으로 임진각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하늘에는 이제 빗방울이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동서남북 탁 트인 하늘은 하나지만 길은 아직 트이지 않았습니다. 하얀 새 한 마리만이 경계 없이 하늘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짧은 여행을 끝내고 다시 인파로 붐비는 서울역으로 돌아오자 마치 잠깐 꿈을 꾸었다가 현실로 돌아온 기분입니다. 평양행 기차 여행은 아직은 꿈이지만,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 도라산역은 굳건하게 서서 그 꿈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끊어진 모든 길들이 연결되고 경의선 열차가 다시 달릴 날이 오기를. 배낭을 메고 평양과 신의주를 지나 러시아까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달리고 싶습니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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