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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Sep 29. 2019

시인 윤동주를 기리며/ 교토 도시샤대학

내게 특별한 여행지 (22), 2017년 2월


교토는 아름다웠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이 연이어 펼쳐진 풍경은 한국과 비슷하여 친숙한 느낌도 듭니다. 도시 중심으로는 가모강이 흐르고, 가모강의 작은 지류도 잘 가꾸어 놓아 천변을 따라 걷기 좋은 도시였습니다. 

  

교토는 자연만 아름다운 게 아니었습니다. 교토에는 오랜 문화가 있었습니다. 천 년 고도답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만 17군데가 있었고, 수많은 사찰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금각사, 은각사, 청수사, 용안사, 천룡사 등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어 나는 가는 곳마다 찬탄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일본이 한반도 도래인(渡來人)―역사 용어로는 4세기부터 7세기경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가리킨다―이 전한 문명의 씨앗을 그냥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꽃피웠다는 사실을 실증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교토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만남은 따로 있었습니다. 일본이 과거와 현재에 이룩한 모든 문화적 성취보다 내게 더 깊고 뜨거운 감정을 불러온 만남. 그것은 도시샤대학에 있는 작은 시비입니다. 

  

고목은 그곳이 오래된 장소임을 느끼게 합니다. 도시샤대학 가는 길도 그랬습니다. 일왕의 처소였던  ‘교토고쇼’ 옆에 있는 도시샤대학 인근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많았습니다. 도시샤대학은 규모는 아담하지만 메이지 시대에 세워진 유서 깊은 기독교계 학교입니다. 후문에서 시비가 있는 정문 근처까지 가는 동안 붉은 벽돌로 지어진 메이지 시대 건물을 몇 채 보았습니다. 정문 입구에는 오래된 예배당이 있었고 그 옆에 아름드리 고목을 지나자 내가 찾던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었습니다. 

  

1917년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수학한 윤동주 시인은 1942년 도쿄 릿쿄대(영문과)에 유학을 왔다가 태평양전쟁으로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이곳 교토 도시샤대학에 편입합니다. 시인이 이 교정을 거닌 시간은 길지 못했습니다. 9개월 후 ‘재교토 조선인 민족주의 학생 그룹’ 사건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45년 3월, 2년의 형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맙니다. 

  

교토 거리를 거닐다가 문득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2017년 올해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교토가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서 시인의 시대와 더 가까운 느낌을 받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별 헤는 밤’은 시인이 일본 유학을 며칠 앞두고 서울에서 쓴 시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앞두고 얼마나 많은 상념이 몰려왔을까요. 가을밤, 자신의 가슴에 밀려드는 온갖 그리움을 시인은 가을 하늘 속에 펼쳐놓습니다. 사랑, 동경, 그리움, 쓸쓸함, 고향에 있는 동무들의 이름과 그리운 어머니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그리고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창씨개명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그 언젠가를 그려봅니다. 

  

문학을 꿈꾸었으나 시인이 마주한 것은 더 이상 우리말조차 쓰지 못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조차 잃어버린 시대에 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윤동주 시인은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가슴 속에서 사랑하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길어 올립니다. 깊은 가을 밤, 시인이 숨을 가다듬으며 찬찬히 호명하는 예쁜 우리말 이름들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동시에 우리 마음을 아프게 수놓습니다. 

  

교토가 아무리 근사하다 한들 왜색 가득한 이곳이 고향의 모든 것을 그토록 정겹게 추억했던 한 청년의 마음을 채워주었을 리 없습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일 뿐이지요. 이 남의 나라의 화려한 근대화의 풍경에 홀려 영혼을 판 수많은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교토를 보아도 반할만한 구석이 많은데, 한일 간의 격차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당시는 더했겠지요. 오죽하면 여운형 선생이 일본에 가게 되었을 때, 일본만 가면 친일파가 된다고 만류하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고향의 “이 모든 이름들”을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시인은 일본의 문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곳과 대비되는 고국의 현실과 그가 헤쳐가야 할 세상을 생각하면서 더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을 때와 교토에서 그를 생각하는 것은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식민지 청년이 느꼈던 쓸쓸함, 외로움, 그리움, 슬픔, 동경, 자기반성 등 모든 감정이 한층 생생하게 가슴에 파고들면서 시인이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감성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최후의 보루 같은 거라고 느꼈습니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을 그리워했던 시인은 황국신민이 될 수 없었지요. 일본 법정에서 2년형을 선고 받은 시인의 죄목은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족의식’을 가진 것이 범죄가 되던 시절, 시인은 자기 정체성을 지닌 한 인간으로 꼿꼿이 서고자 했고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원한 청년으로 우리 가슴에 남았지요. 그래서 교토의 어떤 문화유산보다도 이 작은 시비가 내게는 더 뜻깊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한 사람의 일부가 아니라 어쩌면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 옆에는 정지용 시인의 시비도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보다 좀 더 오래 학교를 다닌 걸로 압니다. 시비에는 ‘압천’이란 시가 새겨져 있었는데, 압천은 교토를 흐르는 유명한 가모강을 말합니다. 시인은 자주 강변을 걸었나봅니다. “압천 십리벌에 해가 저물” 때마다 젊은 나그네의 시름도 깊어간다는 대목이 마음에 남아, 가모강을 지날 때마다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교토에 와서, 내내 질문이 따라왔습니다. 일본 고유의 전통문화를 놀랍도록 잘 간직한 교토는 내게 우리에겐 우리의 역사와 혼을 담은 도시가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어디라고 마땅히 내어놓을 대답을 당장엔 찾지 못했습니다.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 그들이 남긴 시가 있다는 사실이 내게 크나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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