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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Sep 29. 2019

평화의 소녀상/ 광화문 일본대사관

내게 특별한 여행지(23), 2016년 11월


일본대사관은 광화문에서 지척이었다. 광화문 교보빌딩을 지나 골목을 몇 개 통과하니 대사관 건물이 나타났다. 마침 공사 중이어서 본관 건물 전체에 가림막을 쳐놓았다. ‘소녀상은 어디 있지?’ 하고 주위를 눈으로 한 바퀴 훑던 나는 가림막을 친 대사관 건너편 인도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평화의 소녀상과 딱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하는 감정이 올라와서 깜짝 놀랐다. 소녀상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간 언론에서 사진으로 많이 봐서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평소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근처를 지나던 길에 한번 보자 해서 들른 참이었다. 소녀상이 내 마음을 툭 하고 건드릴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진과 실물은 그렇게 달랐다. 소녀는 열네다섯쯤 되었을 법한 작고 가녀린 몸으로 말없이 단정하게 의자에 앉아 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그 가녀린 ‘몸’은 어떤 장문의 역사적 서술보다 더 호소력이 있었다. 예술이 지닌 힘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작가가 소녀상을 만들 때 불어넣은 깊은 애정과 연민의 손길이 이 작품의 아우라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나는 소녀상과 만나자마자 울컥해서 놀라고, 소녀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리고 여린 모습이어서 더욱 마음이 아렸다. 

  

일본대사관 맞은편에 있는 이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20년간 싸운 역사의 결실이다. 위안부 피해자의 최초 증언은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에 282명의 할머니들이 증언에 나섰고, 이분들이 1992년 1월,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며 종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시작한다. 그러나 수요집회가 20년째 계속되어도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수요집회 20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해서 비석을 세우기로 구상한다.          

  

그런데 스케치가 완성되기도 전에 일본 정부의 압박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이에 비석 제작을 맡은 김서경 · 김운성 부부작가는 사람들이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조형물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처음에는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했지만 일제가 꽃다운 소녀들―증언자 김복동 할머니는 15세에, 길원옥 할머니는 13세에 위안부로 끌려갔다―을 강제로 끌고 가 성노예로 삼고 죽이기까지 한 참혹한 역사를 알리기 위해 소녀의 모습으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12월 14일, 수요 집회가 20년, 1000회째를 기록한 날, 이 자리에 처음 세워졌다. 



  


김서경 · 김운성 작가는 6개월에 걸친 소녀상 작업 과정을 ‘빈 의자에 새긴 약속’이라는 책에 밝혀 놓았다.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감동이 더 세세하게 이해되었다. 소녀의 머리를 댕기머리 대신에 거칠게 잘린 머리로 표현한 까닭은 고향과 부모와의 단절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왼쪽 어깨에 앉아 있는 새는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면서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를 뜻한다. 먼저 가신 분들과 현재를 이어주는 고리이다. 소녀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있다. 작가들은 처음에 소녀가 무릎 위에 손을 포갠 모습을 생각했는데 일본이 소녀상 제작 중단을 요구하자 주먹을 쥔 모습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주먹이 분노도 표현하지만 끝까지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도 담았단다. 땅에 닿지 못한 소녀의 발꿈치는 아픔의 세월 동안 불안정하게 살아온 할머니들의 삶을 뜻한다. 

  

작가들이 특히 많은 공을 들인 부분은 소녀의 얼굴이었다. 얼굴만 100번도 넘게 고쳤는데, 화, 울분, 슬픔, 희망까지 모든 표정을 다 담아내고 싶어서였다. 드디어 이 표정이다 싶은 얼굴이 나타났을 때 작가들은 소녀상 앞에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 마음은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소녀의 눈매와 굳게 닫힌 입술에서는 슬픔 뿐 아니라 결연한 의지까지 읽힌다. 

  

소녀상에는 그림자도 있는데 소녀가 아니라 할머니의 모습이다. 작가들의 딸인 소흔 양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그림자는 소녀가 할머니가 되기까지 세월의 아픔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운데에 환생을 상징하는 나비를 새겨 넣었다. 마지막으로 소녀 옆의 빈 의자는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빈자리를 의미하는 동시에 우리의 참여를 기다리는 자리이다. 

  

그렇게 한 소녀가 70여 년 긴 시간의 침묵을 뚫고 우리 앞에 새롭게 나타났다. 그리고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 나오는 어린 소년 다윗처럼 그 작은 몸으로 세상을 흔들어놓고 있다. 20년이나 계속된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에 꿈쩍도 하지 않던 일본이 평화의 소녀상이 함의하는 메시지에 질겁하고는 서둘러 합의에 나섰다. 소녀가 자신의 온몸으로 웅변하는 메시지의 강렬함 때문이었다. 

  

일본의 전쟁 범죄와 인권 유린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일본대사관을 마주보고 있으니 그들이 과민반응을 보일 만도 하다. 작가들은 그간 일본의 태도가 증언하는 모든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하지만 소녀상이 나타나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다고.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셔도 그분들의 의지의 총합체인 이 소녀상은 이 세상 곳곳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가슴에 이미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고. 이제 영원히 없앨 수 없는 상징이 되었노라고. 

  

그리고 그 소녀는 자기 옆의 한 의자, 비어 있는 그 의자에 우리를 초대한다. 그녀의 과거는 물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소환하는 자리이다. 신화 속 공주 바리데기가 온갖 고난과 천시를 뚫고 신이 되어 지상에 돌아온 것처럼 찢기고 핍박받던 소녀 또한 세상에 돌아왔다. 그 소녀의 이름은 ‘평화’이고 우리들의 ‘신’이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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