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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Sep 21. 2019

그대들 돌아오시니/ 종로 경교장

내게 특별한 여행지 (19), 2015년 2월


35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고국을 떠난 한 젊은이가 초로의 노인이 될 때까지의 세월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권세로도 부족해서 더 많은 부와 권력을 누리고자 나라를 팔아넘기는 문서에 서명한 자들이 있었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길을 찾고자 중국과 러시아 땅으로 기약 없는 여정을 떠난 분들이 있었다. 수십 년간 타국 땅을 떠돌며 온갖 고초를 겪고 돌아왔을 때 그들의 나이는 이미 일흔을 넘었다. 백범 김구 선생도 그 중 한 분이었다. 

  

우리들은 이분들을 위대하다고 배우지만―물론 역사적 전환기에 이분들의 모든 선택이 다 옳았던 것은 아니다― 현실은 정반대이다. 남아 있는 흔적이 너무 없어서 우리가 이분들의 숨결을 가깝게 느끼기가 어렵다. 임시정부 인사들의 마지막 흔적이 담겨 있던 경교장이 뒤늦게나마 복원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20분 정도 서쪽으로 걸어가면 정동사거리를 지나 강북삼성병원이 나온다. 강북삼성병원 자리가 경교장 부지인데, 병원이 지어지면서 경교장은 마당이 사라지고 달랑 건물 한 채만 남았다. 경교장 앞뜰은 병원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고 경교장 서쪽 벽은 병원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경교장


원래 경교장은 친일파 최창학 소유의 저택이었다. 해방 후 자신의 신변을 염려한 최창학이 환국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집을 내주면서 김구 선생의 집무실로 쓰였다. 1945년 11월 23일, 선생이 귀국한 날부터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지기까지 약 3년 6개월간 임시정부 인사들과 반탁운동의 구심점이 된 장소다. 김구 선생이 서거하시자 최창학은 유족들에게 돈을 요구했고 그래서 유족들은 경교장을 그에게 다시 반납했다. 이후 경교장은 중화민국과 베트남의 대사관을 거쳐 강북삼성병원의 창고로 오랫동안 사용되다가 노무현 정부에 와서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층에는 임정 인사들이 회의를 했던 응접실과 귀빈식당이 재현되어 있었다. 당시 사진 등을 참고하여 비슷하게 복원했다고 한다. 지하 전시실에는 경교장과 임시정부의 간략한 역사와 함께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김구 선생의 유품이 있었다. 유품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선생이 서거하신 날 입으셨던 저고리였다. 흰 저고리 위로 이리저리 번진 혈흔이 뒤이어 일어날 6.25의 비극을 예언하는 듯했다. 

  

27년 만에 귀향했을 때는 얼마나 감회가 깊었을까. 1945년 11월 3일, 환국을 앞두고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보면 가슴 뭉클하면서도 한편으로 연민이 든다. 환국 이후에 벌어질 일을 모를 때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27년의 세월이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킨 인물이었다. 상하이에서 시작해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중국 각지를 떠도는 동안 많은 이들이 임정을 떠나도 선생은 끝까지 임정과 함께 했다.          


  

임정 요인들의 사진 옆에는 ‘재외 혁명 동지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정지용 시인의 시 ‘그대들 돌아오시니’가 있었다. 해외에서 풍찬노숙을 끝내고 돌아오는 애국지사들을 맞이하는 벅찬 심정이 고스란히 읽혔다. 

  

백성과 나라가 

이적(夷狄)에 팔리우고 

국사(國祠)에 사신(邪神)이 

오연(傲然)히 앉은 지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삼십육 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허울 벗기우고 

외오 돌아섰던 

산하! 이제 바로 돌아지라. 

자휘 잃었던 물 

옛 자리로 새 소리 흘리어라. 

어제 하늘이 아니어니 

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중략)

  


하지만 기쁨은 잠시, 해방 정국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우리 독립운동의 한계로 사상과 노선에 따른 분열이 지적되는데, 임정 요인들도 혼란한 상황 속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가, 혁명가로서의 김구 선생은 훌륭했지만 정치가로서는 한계를 보였고, 그 결과 노회한 이승만이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다. 

  

김구 선생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요즈음은 ‘민족’ 하면 국수주의자나 배타주의자로 폄하되어 이 단어를 합당한 의도로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선생이 추구한 가치가 오늘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체제에 살고 있는 남과 북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민족’이라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념으로 민족을 가르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생이 보기에 정치, 사상, 이념 등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바람 같은 것이라면 민족은 땅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초목처럼 영구적으로 남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자로서 김구 선생의 생각이 집약된 것이 1947년에 쓴 ‘나의 소원’이다. ‘백범일지’ 뒷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역사적 격변기에 한 지도자의 신념과 새로운 나라에 대한 비전을 살펴볼 수 있는 글이다.

  

‘나의 소원’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다른 큰 나라의 연방에 편입되거나 이념으로 갈라진 나라가 아닌,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룬 하나의 ‘민족국가’여야 한다는 것, 2부는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한 사람에 의한 전제정치나 양반 등 특정 집단에 의한 계급독재가 아닌,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법이 제정되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는 것, 3부는 진정한 행복은 무력과 경제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문화가 꽃피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문화를 강조하는 3부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민족국가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피력하는 1부이다. 해방 후 혼란기에 미국과 같은 큰 나라에 편입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은 서로 다른 민족끼리 한 나라를 만들면 반드시 누구는 높아지고 누구는 낮아지는 폐해가 생기기 때문에 완전히 독립한 민족국가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하나 되는 것은 인류 최고의 이상이지만 그것은 먼 장래에 실현되는 일이며, 현실적인 진리는 각 민족마다 독립국가를 세우고 자신의 민족문화를 꽃피워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선생이 말하는 문화 창조의 주체 또한 민족이다. 선생은 인류의 모든 위대한 사상과 문화를 다 받아들이되, 민족국가라는 튼튼한 중심이 있고 그 나라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를 보장할 때 훌륭한 사상과 문화가 꽃필 수 있다고 여겼다. 옳은 말씀이다. 외래문화를 그냥 다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의 이식이지 소화가 아니다. 소화해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때 문화를 생산하는 주체가 약화된다. 자기가 죽는 것이다. 한 사회가 밖에서 유입되는 문화를 자기 관점을 갖고 주체적으로 수용할 때 문화가 풍요로워진다. 새로운 창조는 언제나 나의 전통과 문화의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김구 선생은 삼천만 동포가 힘을 합치기만 하면 삼십년 안에 우리나라가 세계에 우뚝 설 수 있으리라 예언한다. 선생이 상하이를 비롯하여 중국 대륙 전역을 돌아다닌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관점을 가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거대한 중국 대륙에서 온갖 민족들의 각축을 목격했던 선생은 단일민족국가라는 것이 얼마나 큰 장점이며, 우리 민족이 단결하기만 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울 수 있을지 체감했을 것이다. 이 세계에 수천 년간 같은 언어와 역사를 이어온 나라는 한국과 일본을 포함하여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점이다. 

  

경교장 2층에는 김구 선생의 집무 공간과 임정 요인들의 숙소로 쓰인 방이 있었다. 서거하실 당시 안두희가 쏜 총알로 금이 간 창문을 그 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선생은 분단은 반드시 내전으로 이어지므로 “삼팔선을 베고 누울지언정” 분단을 막고자 했다. 반면에 암살범 안두희는 6.25가 터지자마자 육군 소위로 복귀해서 1959년까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육군 대위를 지낸다. 전쟁은 민족 전체에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을 가져왔지만 누군가에게는 새 삶의 기회가 되었다.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이 마지막까지 애쓴 것은 민족의 분단을 막는 일이었다. 분단이 이 땅에 가져온 고통은 헤아릴 수가 없다. 선생 서거 후 70년이 지난 지금 경교장은 내게 다시 ‘민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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