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특별한 여행지 (12), 2009년 12월
제주도는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네 지역으로 구분된다. 동쪽의 성산, 서쪽의 고산, 남쪽의 서귀포시, 북쪽의 제주시이다. 올레꾼들이 많이 찾는 길은 7~10구간, 서귀포에서 중문을 거쳐 송악산에 이르는 남부 해안이다. 예쁘고 아기자기해서 인기가 많다. 11구간부터는 서부 지역인 ‘고산’에 해당되는데, 앞선 코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일단 이 지역은 관광지가 아니다. 모슬포항을 벗어나면 식당 하나 찾기가 쉽지 않다. 밭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풍경도 단조롭다. 그런데 11~12구간을 다 걷고 나니 이 일대의 다소 황량한 풍경이 마음에 남았다. 예쁜 남부 해안보다 이쪽이 이상하게 더 마음이 간다고 올레 쉼터지기에게 말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었다.
고산 지역은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에요. 제주에서 개발이 가장 덜 된 지역이고, 그래서 제주민의 삶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거든요. 알뜨르 비행장에서부터 섯알오름, 모슬봉을 지나는 길 곳곳에 일제 때 전쟁기지의 흔적이 남아 있고, 또 4.3항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의 땅이기도 하고, 이런 걸 생각할 수 있는 길이 다른 곳엔 많지 않지요. 또 해안이 아닌 제주 내륙의 모습을 만날 수 있고요.
그랬다. 대정읍에서 시작되는 12구간은 다소 지루하면서도 고유한 매력이 있었다. 해안에 이를 때까지 몇 시간 내륙을 통과해야 하는데, 풍광을 본다기보다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길이다. 사실 모든 도보여행이 그런 게 아니겠는가. 처음엔 우리 눈을 사로잡는 바깥 풍경에 매혹되지만 길을 계속할수록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은, 이 세상 위에서 씩씩한 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다.
끝없는 들판 사이를 걷다 보면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상념이 끊어지면서 이유 없는 행복감이 마음에 차오르는 때다. 경치가 특별해서도 아니고, 길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저 길을 걷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마라토너들이 말하는 ‘러너스 하이’가 이와 비슷한 느낌일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짐을 멘 어깨는 다시 아파오기 시작한다.
오전 내내 밭과 마을 사이로 요리조리 나 있던 올레 길은 ‘신도 도구리길’을 시작으로 바닷길에 접어들었다. 거기서부터 제주 서쪽 끝에 있는 오름, 수월봉까지의 한 시간이 가장 힘들었다. 새로 산 등산화마저 말썽을 일으킨다. 5년째 신던 등산화가 밑창이 떨어져서 이번에 새로 장만했는데, 살짝 안 맞는지 왼쪽 발목이 아파온다. 이 길이 대체 언제 끝나나 할 무렵에 큰 선물을 받았다. 수월봉에서 당산봉까지 한 시간 가량을 더 걷자 올레길은 ‘생이기정 바닷길’에 접어들었고,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바닷가 높다란 언덕은 온통 마른 풀숲으로 덮여 있고, 그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좁은 길이 나 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풀숲 사이를 지나며 마른 풀이 지닌 생명력에 감탄한다. 풀은 겨울이라 노랗게 빛이 바랬지만 이보다 더 억세고 싱싱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철 불어오는 바람이 이들의 몸을 이처럼 단단하게 만들었겠지 싶다.
그리고 그 길에서 바라보는 제주 서쪽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섬, 차귀도는 12구간의 진정한 백미였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이 지극히 맑고 깨끗한 바다가 눈물 날 만큼의 감동을 선사한다. 하루 종일 걸은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원래 차귀도 일대가 일몰로 유명하다고 한다. 구름이 많아서 일몰은 보지 못했다. 이 섬에 얽힌 전설도 흥미롭다. 중국 관리가 제주의 혈맥을 끊고 돌아가는 길에 이 일대에서 풍랑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는 것을 막는 섬, 차귀도(遮歸島)이다.
생이기정 바닷길을 지나면 드디어 12구간의 종점, 용수 포구에 닿는다. 용수 포구에는 ‘절부암’이 있었다. 배 타고 나간 남편이 실종되고 시신조차 못 찾자 아내가 목을 매고 죽었는데, 그 자리 바로 앞바다에서 며칠 뒤 남편의 시신이 떠올랐다는 곳. 여행지가 아닌, 생활 터전으로서의 바다의 가혹함을 보여주는 설화이다.
용수 포구에서 기대치 못한 선물을 한 가지 더 받았다. 김대건 신부 성지다. 1845년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그 해 8월 말, 라파엘호를 타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풍랑으로 서해에서 표류하다가 9월 말경 간신히 제주에 표착하는데, 그곳이 용수 포구였다. 성당과 기념관이 평범해서 아쉬웠지만 그의 자취가 제주에도 있다니 놀라웠다.
시대의 바람이 그를 격랑 한가운데로 떠밀었다. 15세에 만주와 요동을 거쳐 마카오에 이르기까지 진리를 찾아 떠났던 먼 길. 남들보다 몸이 약해 수시로 아팠지만 사제가 되려는 강한 열망으로 9년간의 타국생활을 버텨냈다고 한다. 제주에서 며칠간 배를 수리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중순 금강 하구에 무사히 도착한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는 조선 첫 사제로서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귀국한 지 1년 1개월 만에 순교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스물다섯의 꽃 같은 나이에 기쁘게, 후회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가 이토록 짧은 생애를 그 누구보다 꽉 채워서, 자기 전부를 활활 태우며 살았음을 기억한다. 자신의 재능과 사랑을 다 쓰고 가는 삶. 그래서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을까. 아니 어찌 아쉬움이 없었으랴마는 김대건 신부는 아마도 그 아쉬움조차 하늘에 맡겼을 것 같다.
이 바다와 자연이 그러하듯이. 이 바다가 세상 그 무엇보다 푸르고, 이 풀들이 누구보다 씩씩하게 흔들리고 있듯이. 인간의 삶 또한 궁극적으로는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자연처럼 지상에 자기를 아낌없이 풀어놓았다가 기꺼이 자연으로 귀환하는 것.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