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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Aug 30. 2019

천 번의 작업/ 서귀포 김영갑갤러리

내게 특별한 여행지 (10), 2009년 2월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몇 년 전 이 책을 읽고부터 제주가, 더 정확히는 한 남자가 마음 한편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사진작가 김영갑. 이십대 후반에 제주에 왔다가 야생적인 자연에 반해서 20년 동안 쉴 새 없이 제주의 오름과 들판과 안개와 바다를 찍었던 남자. 밥값이 없어 굶으면서도 필름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가난 속에서도 매년 전시회를 개최했던 남자. 

  

책에서 그가 유고처럼 펼쳐놓은 글과 사진은 특별하다는 말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그의 삶의 정수였다. 제주의 원초적인 자연 속에서 그가 온몸으로 느낀 ‘삽시간의 황홀’이 글과 사진 속에 밀밀히 배어 있었다. 나는 한 남자의 열정, 고독, 예술혼, 자연에 대한 사랑 앞에 깊이 감동했다. 보기 드문 구도의 정신이었다. 

  

갤러리 ‘두모악’은 그가 생애 말년에 루게릭병을 앓을 무렵 직접 폐교를 개조해서 만든 전시관이다. 이 세상에 남겨놓은 그의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란다. 나는 제주에 와서 두모악에 들렀다기보다는 두모악이 보고 싶어서 제주에 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꼭 한 번 이분의 자취를 만나고 싶었고, 보이는 것 너머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이분의 특별한 시선으로 제주를 느껴보고 싶었다. 


 


작품이 기대했던 것만큼 많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파노라마 사진 하나하나에는 제주만이 지닌 영겁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다. 사진은 정지된 장면을 담지만, 그의 사진은 정지해있지 않았다. 바다도 억새밭도 꽃도 바위도 나무도 춤추는 바람과 더불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바람의 혼을 사진에 담아내었다. 그것은 바로 제주의 혼이었다. 그의 사진을 보노라면 우리 몸도 풀잎이 되고 바위가 되고 파도가 되어 바람 속에서 바람과 함께 떨린다. 

  

아무도 제주의 오름을 거들떠보지 않던 시기에 그는 오름에 반해서 그것을 찍고 또 찍었다. 그가 특별히 사랑한 것은 ‘용눈이오름’이었다. 갤러리에는 생전 그가 했던 작업과 인터뷰가 담긴, 제주방송에서 제작한 다큐한 편을 상영한다. 일행이 있어서 앞부분밖에 보지 못했지만, 잊지 못할 장면을 만났다. 그는 용눈이오름을 천 장도 넘게 찍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 작품이 될 만한 것을 추려내니 백 장 정도, 또 추려내니 몇 십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작업한다고 했는데, 아직 멀었더라고.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들더라고. 

  

그리고 그는 자신은 ‘용눈이오름’ 하나를 가졌다고 말한다. 오늘날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건 그런 정신이며,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천 번의 셔터를 누른 작가. 용눈이오름을 가졌다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을 때 얼핏 깨달았다. 그가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족 없이 홀로 떠돌며 가난과 고독에 몸부림쳤지만, 너무 고생해서 불치병까지 걸렸지만, 그래서 마흔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이 세상 최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한 생을 뒹굴었고, 그것을 작품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제주가 간직한 모든 아름다움을 속속들이 맛보았다. 두 번의 십 년이 흐르는 동안 사계절의 눈비를 맞으면서 그 역시 눈과 비와 안개와 구름의 일부가 되었다. 삽시간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남겨둔 채 사라졌다. 

  

우리는 그의 삶의 표면에 드러나는 고통만을 보기 쉽지만 그는 누구보다 섬세하고 뜨거운 감성으로 이 세계를 낱낱이 탐험하고 간 사람이다. 그는 책에서 적고 있다. 숱한 세월 동안 제주 사람들이 꿈꾸어왔던 이상향, ‘이어도’를 자신은 보았노라고. 그가 느낀 행복의 크기를 우리 같은 범인은 가늠하기 어려우리라. 

  

전신주 하나만 들어서도 풍경은 느낌이 전혀 달라진다고 사진작가 김영갑은 말했다. 이제, 인간의 손길에 훼손된 적이 없는, 원초적인 힘과 생동감으로 가득한, 그 거센 바람 속에서도 제각각 굳건한 생명을 피워 올린 풀꽃도 벌레도 작은 짐승들도 제주에서 만나보기 어렵다. 인간이 점령한 곳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러니, 그의 특별한 사진을 통해 이 땅이 지녔던 본래의 신성한 기운을 느낄 수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해안과 오름의 풍경은 바뀌어도 바람과 파도와 빗소리는 여전할 것이므로,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다면 그가 만난 이어도를 어쩌면 우리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정말로 정성을 다해 이 자연의 소리에 우리 존재를 기울여야 하겠지. 

  

그 섬에 그가 있었다.



@2009


김영갑 사진
김영갑 사진
김영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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