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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Aug 27. 2019

정약용 선생이 기거한 주막/ 강진 사의재

내게 특별한 여행지 (6), 2017년 8월


한 남자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명민했고 성균관에서 문재를 드날렸으며, 과거 급제 후에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입신의 길을 걸었던 인물.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남해 바다 끝, 머나먼 강진 땅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가 고작 마흔이었다. 

  

정조 사후에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동생(정약종)은 이십대의 나이에 순교를 택하고 형(정약전)과 자신은 배교하여 간신히 사형을 면한다. 하지만 형과는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흑산도로 길이 갈라지고, 자신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유배지 강진의 한 주막에 당도했던 남자.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나는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서만 기거한 줄 알았는데, 그의 첫 흔적이 남아 있는 ‘사의재’(四宜齋)’라는 인상적인 장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김영랑 생가에 들렀다가 그 앞의 한식당이 4인상만 된다고 해서 부근에서 다른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 사의재이다. 


  


1801년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은 ‘동문매반가’라는 주막집 주모의 호의로 18년 강진 유배 기간 중 첫 4년을 그 집 방 한 칸을 얻어 생활했다고 한다. 그 주막 터가 고증을 거쳐 현재 ‘사의재’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복원된 장소지만 그곳에는 한 그루 오래된 나무가 있고, 운치 있는 작은 연못과 정원이 어우러져 예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엘리트로 줄곧 살아왔던 다산 선생이 동기의 죽음을 겪으며 마흔에 이곳에 외따로 떨어졌을 때 그의 좌절과 상실은 얼마나 깊었을까.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땅이 메워져 사의재에서 바다가 꽤 멀리 보인다. 하지만 당시는 갯벌이 지척이었을 테고, 햇살 아래 엷게 빛나는 그 바다 또한 한없는 막막함을 전해주었으리라. 

  

그런 그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종이를 사주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칠 것을 권유한 사람이 주막집 주모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약용 선생이 주모의 권유를 받아들여 방 이름을 ‘사의재’라 짓고 새롭게 마음을 다잡는 데는 약 8개월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사의재’란 생각, 얼굴, 말, 행동 네 가지를 의롭게 가지는 것을 뜻한다. 내게 사의재는 그가 좌절감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며 보냈던 8개월의 시간과 그 우울에서 벗어나 마음을 잡도록 도와준 한 주모의 마음씀씀이를 전해준 공간이었다. 이후 정약용은 방황을 끝내고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유배 생활이 길어지면서 제자들과 함께 많은 연구 저작을 내놓는다. 

  

사의재에는 실제로 주막집이 있어서 우리는 아욱된장국으로 소박한 저녁식사를 했다. 사의재 바로 옆에는 강진군에서 운영하는 ‘사의재 한옥체험관’이 있었다. 마침 그 날 방 한 칸이 남아서 근사하게 지어놓은 한옥에서 하루 머물다 가는 행운도 누렸다. 강진은 특별한 일정 없이 지나던 길에 들른 참이라 숙소가 없으면 나가서 다른 데서 묵으려 했는데,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사의재가 우리에게 쉬어갈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사의재 한옥체험관 마당에는 주모와 그의 딸의 청동상이 서 있다. 마땅한 헌사로 여겨졌다. 어쩌면, 삶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고 느끼는 남자를 살려낸 건, 배우지 못했지만 삶의 숱한 고비를 넘겨왔고 넘길 줄을 알았던, 억세게 살아왔던 한 주모의 지혜로움이었다. 다산 선생은 그곳에서 그가 바라던 삶의 길은 아니었겠지만, “나이만 먹어가고 뜻한 일을 이루지 못한 서글픔”을 이겨내고 다시 읽고 쓰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한, 아무리 험한 파고가 덮쳐 와도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걸, 우리가 원하는 길이 아닐지라도, 그 잃어버린 길 위에서도 다시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는 것을 강진 사의재는 말해주었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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