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간은 빛의 속도로 흐릅니다. 가족들이 미국으로 간 지 5년이 되었습니다. 빛은 소리가 없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소리 없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제 관련 책을 보다가 흑인 노예에 대한 기록을 읽었습니다.
‘노예 가족을 팝니다. 낱개로도 팝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이별을 했습니다.
사회 계층, 자본가, 노동자, 돈, 의식주, 교육, 문화, 욕심, 자존심, 두려움…. 무엇이 가족을 떨어져 살게 만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떠날 때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벌써 중고등 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서 가족들은 계속 미국에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가슴은 예상보다 더 먹먹해졌습니다. 퇴근길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입을 꽉 다물자 운전대를 잡은 손이 떨렸습니다.
가족 대신에 가족같이 지내던 근골격계 질환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목 디스크가 생겨서 한동안 병원을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목을 잡아당겨 늘리다가 차도가 없어서 주사를 맞았습니다. 주사를 목 뒤에다가 맞을 때는 기분이 싸- 했는데, 효과가 없어서 목 앞에다 맞을 때는 침 넘기는 목 근육이 굳을 듯 두려움이 컸습니다.
어느 날 아침부터는 오른쪽 발등의 감각도 무뎌졌습니다. 군대에서 다친 허리 디스크의 후유증 때문에 예전부터 다리가 저려 왔었는데, 이번에는 마치 양말을 신은 것처럼 감각이 무뎌졌습니다. 회복될 수 없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큰 병원 몇 곳을 가보았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송곳으로 제 발등을 찔렀습니다. 그리고는 각기 다른 처방을 내렸습니다.
“인공 디스크 삽입술을 추천합니다.”
“재수술하면 돼요. 아직 젊으니까 인공 디스크는 필요 없어요.”
“아프지 않으면 그냥 사세요.”
두려움은 제가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9월이 되자 인사팀에서는 휴가 사용을 독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처럼 저도 그 아래서 발버둥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요? 저는 독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나오는 그 수도원 신학교로 갔습니다. 1891년, 헤르만 헤세는 독일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입학했고 그다음 해에 그 신학교를 도망쳐 나왔습니다. 제가 휴가를 빌미로 도망쳐 간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어릴 적에 대한항공 TV광고로 봤던 곳. 그땐 이곳도, 이곳에 있는 제 모습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한 저는 택시를 타고 독일 법인 직원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동생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하녀 방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여행 얘기를 하면서 그녀의 남동생은 스트라스부르를, 그녀는 하이델베르크를 추천했습니다. 스트라스부르는 독일 국경에 가까운 프랑스에 있었습니다. 렌터카를 예약하고 스트라스부르, 마울브론,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순으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독일 직원은 기꺼이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스트라스부르는 예뻤습니다. 그곳은 알자스로렌 지방의 동화 같은 집들로 가득했고 집집마다 다채로운 꽃송이들이 창가에 놓여 있었습니다. 꽃에 물을 주는 여인은 저에게 <가드너 The Gardner>의 리디아처럼 보였습니다. 달콤한 빵 냄새를 따라서 골목 구석구석을 걷는데, 모든 빵집이 리디아의 아저씨네 빵집 같아 보이더군요. <인생의 회전목마>를 들으며 얼마나 걸었는지 모릅니다. 길을 잃으면 성당의 첨탑이 우리가 어디쯤에 있는지 알려 주었고, 성당의 종소리는 우리가 어느 시간에 있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시간의 무게를 머금은 종소리에는 바람을 밀어 햇살을 부드럽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 마울브론 수도원을 찾아갔습니다. 그것은 지어진 지 천 년이 다 되어가는 수도원이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수도원의 거친 돌벽이 엄숙한 돌기둥 사이로 종종거리며 달렸을 어린 학생들의 발소리를 수백 년 동안 머금었다가 참지 못해 조금씩, 아주 조금씩 토해내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벽과 기둥이 만든 눈길을 따라 올라가면 퇴색된 녹색 아치가 손가락을 깎지 끼듯이 아름답게 천정에서 교차되었고, 그 선을 따라 다시 내려오면 수수한 창문이 넉넉한 햇살을 담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창문으로 파고든 빛은 바닥에 손바닥을 대듯이 부드러운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창문 너머엔 수도원의 마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분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갈증을 느꼈기에 헤르만 헤세는 이곳에서 도망쳤을까요?
마울브론에서 돌아오는 길에 독일 직원이 말했습니다.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말했습니다. 무너진 성벽 그대로의 모습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성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이 힘들고 어렵기에 우리네 인생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일까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에 애착이 안 가도 괜찮으니까 생이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휴가를 안 쓰면 하루당 십여 만원 정도의 보상비가 나왔습니다. 정산할 때 보면 보통 백만 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그 돈 벌려고 휴가를 적게 가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주로 결혼한 가장들이었습니다. 휴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돈 생각이 났습니다. 여전히 저는 수레바퀴 아래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