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해정 Apr 11. 2019

지구가 다시 얼어붙어도

책상에 앉아 종자은행을 생각하다 

2018년 3월, 일본은 배 3척에 차 1만대를 실어 뉴질랜드로 향하는 바다에 띄었다. 하지만 이 차는 뉴질랜드 육지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바퀴가 묶여버리고 말았다. 일본과 뉴질랜드 무역협정에 무슨 이슈라도 생긴걸까? 아니다. 배에서 노린재가 다량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위협을 느끼면 고약한 냄새를 뿜으며 도망쳐 ‘방귀벌레’라고도 불리는 노린재는 한국이나 일본, 중국에서는 흔하디흔한 곤충이다. 하지만 뉴질랜드에는 노린재가 없다. 뉴질랜드는 노린재의 입국을 불허해 노린재가 사라질 때까지 차를 육지에 내려놓지 않았다. 


뉴질랜드의 노린재처럼 '외래종'의 유입은 큰 이슈다. 한국도 황소개구리니, 베쓰니 하는 외래종이 토종을 잡아먹는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만난다. 외래종 유입이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천적이 함께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천적이 없으니 번식 속도도 빠르고 고유종을 잡아먹으며 농작물에 큰 피해를 준다. 


몇몇 호기심이 왕성한 일본 노린재는 방역의 틈새를 비집고 이미 뉴질랜드 땅을 밟았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세계의 물리적 경계가 희미해지는 이 세상에서, 노린재쯤은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외래종이 100% 방제된 일은 0%

황소개구리와 노린재처럼, 식물에도 외래종이 있다. 그리고 동물에 비해 식별이 다소 어려운 이 식물 외래종이 다른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일은 흔한 일이다. 


고려대학교 종자은행 책임자인 홍선희 교수님과 인터뷰를 한 적 있다. 이곳은 토종 종자를 보관하고 연구기관에 종자를 대여해주는 일을 한다. 인터뷰 도중 교수님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두꺼운 책으로 눌러놓은 신문지를 꺼냈다. 신문지에는 납작하게 눌린 풀이 있었다. 중국산 소래풀로, 한국에서는 처음 발견되었다고. 내 눈에는 흔하디흔한 풀인데 교수님은 ‘처음 보는 것 아니냐’며 눈을 반짝였다. 


이 풀은 어떻게 왔을까. 

교수님은 이 풀을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서 발견했다. 조경을 꾸밀 때 저렴한 중국산 식물을 이용하는데 그 식물 중 하나에 ‘초대받지 않은’ 소래풀 씨앗이 묻어 한국에 첫 뿌리를 내렸다고 교수님은 이 풀의 정체를 알기 위해 국내외 도감을 모두 뒤져야 했다. 


뉴질랜드에서 입국 거부 딱지를 받은 노린재와 마찬가지로 천적, 즉 종자를 먹는 곤충이 없기 때문에 소래풀은 굉장히 빠르게 번식할 거라고 했다. 그 번식 속도 때문에 방제(防除)가 어렵다. 지금까지 외래종이 100% 방제된 경우는 0%다. 


지구가 다시 얼어붙어도 

고려대학교 야생자원식물 종자은행은 대학연구기관에 딸린 작은 규모의 은행이다. 씨앗은 식당에서 볼법한 대형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종자은행은 경북 봉화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산림의 종자를 수집해 영구적으로 보존한다. 


세계의 모든 종자를 보관하는 은행도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약 1000km가량 떨어진 곳에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이란 섬에 130m 아래로 내려가는 얼음동굴 지하갱도가 있는데, 이 갱도가 스발바 국제종자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라 부르는 종자은행이다. 이곳에 전 세계에서 수집한 450만 점의 종자가 잠들어있다. 우리나라도 2008년 토종 종자 5000점을 이곳에 보냈다. 


크리스털을 본뜬 입구가 멋지다. 이 문을 열 첫 ‘외지인’은 과연 누가 될까?


재미있는 점은 이 은행의 거룩하기까지한 사명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먼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임무를 가졌다. 종자은행은 핵전쟁, 소행성 충돌, 기상이변 등 지구에 재앙이 찾아올 때를 대비한 곳이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재앙으로 마치 공룡이 멸종한 그때처럼 지구가 얼어붙어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해도, 이곳에 잠들어 있는 씨앗을 이용하면 지구를 예전처럼 '푸른 별'로 되돌릴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을 '최후의 보루' '노아의 방주'라 부르는 이유다. 영화 <매드맥스>에서 씨앗을 소중히 보관하던 여인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다. 


교수님에게 언젠가 이곳을 여행하고 싶다고 했더니, 북극이라 너무 추운 데다 일반인에겐 잘 공개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노린재처럼 나 역시 출입을 금지당할 것이다. 그래서 스발바 국제종자저장고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홈페이지에서 360도로 내부를 둘러볼 수 있게 해놨다. (VR 디바이스가 있으면 VR로도 가능!) 아주 특별한 곳은 아니다. 이케아 물류 창고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시간은 오후 8시 44분. 처리하고 싶은 일이 있어 오랜만에 사무실에 늦게 남아 있다. 너무 조급하게 사는 건 아닌지 나에 대한 미움이 찾아올 때, 먼 미래를 생각해 지구의 종자를 보관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는 당장의 일을, 누군가는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을 처리하며, 끝도 없는 수직선에 놓인 빈칸을 나누어 칠해가고 있는 듯하다. 너무 낭만 되기만 한 생각일까. 서로 자기가 맡은 위치에서 역할을 다 하고 있으니 조급하지 말자는 한숨을 내쉬며 일을 마무리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패터슨의 하루를 따라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