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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해정 Jul 11. 2019

나초와 얼음물

타란티노와 하루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던 날, 처음으로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예약한 친구를 따라 비오는 압구정을 걸었다. 압구정도 처음이었다. 아주 작은 극장,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노란 영화포스터에 여자 넷. 그렇게 압구정 스폰지하우스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데쓰 프루프>를 보았다.


데쓰 프루프 (2007)


줄거리는 이렇다. 커트 러셀은 스턴트맨으로 술집에서 만난 여자들을 차를 태워 위험에 빠뜨리는 걸 즐긴다. 어느 날 또 다른 희생자를 찾다가 여자들에게 당하고 만다. 이 영화를 세 단어로 말하자면, 스릴과 쾌감 그리고 나초다. 


카메라는 먼저 점퍼를 입은 남자의 어깨를 보여준다. 들썩이는 어깨너머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과 입이 보인다. 커트 러셀은 나초를 먹고 있다. 터키석이 박힌 반지를 낀 두툼한 손가락으로 토마토와 할라피뇨가 토핑된 나초를 집는다. 피자치즈가 늘어나는 걸 보니 꽤 뜨거울 법도 한데, 그는 그 뜨거움을 모르는 것 같다. 살인에 대한 욕망을 대변하는 게걸스러운 식사. 맥주 한 잔 없이 얼음물에 나초를 ‘처리해 버린다’. (이 사이트에서 이 장면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나는 그렇게까지 나초를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만해도 나초를 먹어본 적도 없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초의 환영에 시달리다,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나초를 파는 집을 찾았다. 얇은 과자처럼 생긴 나초는 과자 '썬칩'과는 맛이 사뭇 달랐다. 노란 치즈 딥소스에 찍어먹도록 나왔는데, 맛이 너무 별로였다. 게다가 영화에선 이걸 얼음물에 먹는다. 이걸 얼음물에 먹는다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

타란티노와 커트 러셀은 10년 뒤쯤 <헤이트풀8>이란 작품에서 다시 만난다. 커트 러셀은 이번엔 나초 대신 뜨거운 스튜를 먹는다. 거센 눈보라를 헤치고 산장에 들어온 음흉한 인물들. 과거의 일과, 앞으로의 일과, 바닥 밑의 일은 상상도 못 한 채 스튜를 나눠 먹는다. 둔탁한 소리를 내는 나무그릇과 나무숟가락, 큼직한 고기 건더기. 나초를 보고 군침을 흘렸던 것처럼, 화면을 채운 스튜에 마음을 뺏겼다. 



<데스 프루프> 를 볼 때보다 좀더 어른이 된 나는 스튜 정도는 만들 수 있었고, 당장 스튜를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으로 돌아와 와인과 토마토, 소고기와 감자를 잔뜩 넣고 푹푹 스튜를 끓였다. 나초와 달리 맛있었던 스튜! 영화에서처럼 눈이 펑펑 내려주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코끝이 찡한 추위가 며칠간 계속된 터라 창문을 열어놓으니 영화의 여운이 오래 맴돌았다. 뜨거운 국물이 몸을 데우니 나초의 응어리가 비로소 풀리는 기분이었다. 

타란티너와 커트 러셀이 뻑뻑한 나초를 추천한 그 실수를 만회하는 것만 같았다.


달리기하고 맥주 한 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인물의 욕망을 먹는 일에 담아내기 능하다면,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식생활을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일에 능하다. 그것도 아주 공들여서 말하기 때문에 장을 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 속에 나온 요리를 소재로 하는 책들도 파생되어 나올 정도 그의 식탁 위 철학은 한결같고 확고하다. 


에세이집에서도 먹는 것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는다. 특히나 맥주에 대한 애정. 야구를 보며 맥주를 마시다 소설가가 되기로 했다는 그답게 소설이나 수필에 맥주에 대한 언급이 많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이것이다. 에세이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에서 골랐다. 


기록이야 어찌되었던 42㎞를 다 뛰고 난 뒤에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마시는 맥주의 맛이란 그야말로 최고다. 이 맛을 능가할 만큼 맛있는 것을 나는 달리 떠올릴 수가 없다. 그러나 대개 마지막 5㎞ 정도는 “맥주, 맥주”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달리게 된다. 이렇게 가슴 속까지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42㎞라는 아득한 거리를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어떨 때는 너무 잔인한 조건인 듯 싶게 느껴지고, 어떨 때는 지극히 정당한 거래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달리기 뒤에 마시는 맥주의 맛은 어떨까. 그 맛을 알기 위해 달리기를 배워야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길목에 설 때마다 제철 먹거리를 찾아내기에 바쁘다. 식사 때면 떠들썩한 가족 많은 집에 태어나 늘 조용한 식사를 바라고 혼밥에 세상 행복해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먹는 음식이 가장 맛있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하듯, 그리운 친구에게 연락해 식사 자리를 만들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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