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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해정 Feb 28. 2019

패터슨의 하루를 따라서

영화 <패터슨> 

햇살이 내려앉은 침대. 침대 옆 테이블에 둔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오전 6시 15분.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 위 개어놓은 옷을 입는다.  

아침 식사는 시리얼. 식탁 위에 둔 성냥갑을 유심히 살핀다.  

 

준비됐어? 

동료가 신호하면 시동을 켜고 운전대를 잡는, 그는 버스 기사다. 


버스 안에서 승객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덧 퇴근 시간.  

집에 도착하니 아내와 작은 개가 반긴다. 

다시 밖으로 나와 애완견 산책 겸 동네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눈을 뜨면 6시 15분. 햇살이 다시, 고요하게 내려앉은 침대에서 어제와 같은 하루를 시작한다.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 그 조용한 동네 이야기?'라며 알아차린다. 

맞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 이야기다. 동네 이름도 패터슨이고, 주인공 이름도 패터슨인 그런 영화다.



주인공의 일상은 매우 비슷하게 흘러간다. 눈을 뜨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산책하고, 잠드는. 

남들이 보기엔 늘 똑같은 하루다. 그러나 패터슨에겐 하루하루가 다르다. 비밀노트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버스기자이자, 시인이다. 


운전대를 잡기 전 동료의 신호를 기다리며 비밀노트에 시를 적는다. 시의 제목은 '오하이오 블루팁'. 아침을 먹으며 만지작거린 성냥의 브랜드가 오늘의 시상이 된다. 


패터슨은 시를 적음으로써 매일을 다르게 만든다. 

영화는 그의 일상을 보여주며 우리도 그런 특별한 하루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정해진 루트를 달리는 버스 안에 있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그 루트를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기에. 

 

'오-하이-오- 블루-팁'이라고 내뱉는 패터슨의 음성이 아직 귓가에 맴돈다. 

영화만큼 묵직하고 담백한 목소리다. 영화 속 시는 퓰리처 상 후보에 오른 론 패짓과 짐 자무쉬 감독이 썼다. 

 


매일을 다르게 보내는 법 

매일을 다르게 보낼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시든, 일기든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이라는 행위를 위해 인간은 어제와 다른 순간을 포착하고 또 다른 내일을 상상할 수 있다. 또 기록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근거가 된다. 해가 지나 서랍으로 들어가야 하는 업무수첩이나, 어릴 때 쓴 일기장을 들춰볼 때 새로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을 다들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산발할 기억이 기록이라는 매듭에 단단히 묶여 나조차 몰랐던 나에 대해 말해준다.
 

매년 새해의 목표는 일기쓰기다. 재작년에도 그랬고, 작년에도 그랬는데 봄이 오기도 전에 포기하고 말아서 올해는 아예 목표로 삼지도 않았다. 그러나 <패터슨>을 보고 나니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는 욕심이 슬그머니 앞선다. 패터슨이 자신의 하루를 마법처럼 만드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러고 싶다. 


마침 내일이면 3월이다. 3월은 1월을 놓친 게으름뱅이를 위해 '새로운 해'를 시작하게 하는 용기를 주는 달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작년 한 해간, 일주일에 한 번씩 웹진에 글을 쓸 수 있도록 매체의 한 지면을 할당받았던 일이 참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것도 일이라, 글을 써야 하는 월요일이 돌아오면 부담감에 초조해지기도 했지만. 그래서 월요일 아침이면 폴 오스터의 소설 제목 '빵굽는 타자기'를 떠올렸다. 이제는 의무적으로 써야 할 글이 없음에 홀가분하지만, 가끔씩 타자기가 구워주는 빵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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