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해정 Jan 04. 2019

글 말고 기억력이 좋은 탓에

마지막 칼럼을 쓰며 

유치원에 포스터가 붙었다. 다양한 직업이 그려져 있었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을 골라 그림 밑에 스티커를 붙이는 포스터였다. 나는 꿈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대충 보니 여자애들 절반 이상이 간호사에 스티커를 붙이더라. 나는 그렇게 간호사가 되기로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주변에서 '여자애들은 미술학원이나 피아노학원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언니가 피아노학원에 가길래, 나는 미술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조사하던 날,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하니 선생님은 '미술학원에 다니니 화가가 되라'고 했다. 그렇게 이번에는 화가가 되기로 했다! 


부모님은 동화책을 참 많이 사주셨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곧장 와 동생들을 돌봐야했는데, 그때 동화책을 읽히라는 것. 얼결에 나는 책을 많이 읽으며 성장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엄마는 작가가 되려면 경험이 아주 많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책꽂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책들 모두 작가가 경험한 일을 쓴 거란다. 


엄마의 서가엔 재미있는 책들이 많아 보였다. 읽지는 못하게 했다. 어린이와 어른의 책은 다르다고. 신경숙, 박완서와 같은 여성작가이 많았고, <꺼리>와 책도 기억난다. 나는 좀 음흉해서 '어린이의 책과 다른 어른의 책'을 느껴보고 싶었다. 분명 성인의 무언가가 있으리라. 그러다 구석에 빨갛고 검은 책을 발견했다. 부모님은 늘 일에 나가고 없었기에 책을 발견하자 마자 폈지만 이내 닫았다. 내용이 으스스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진짜 있었던 경험을 쓴 건가?'

'작가가 되려면 이런 경험을 해야 하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구석에 빨갛고 검은 책은 호러물의 거장인 스티브 킹의 소설이었다. 이 기억 때문에 작법서 말고는 스티브 킹의 소설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할 때 

2017년 10월부터 사보 <글로벌 웹진>에 글을 연재했다. 그간 기사나 책 리뷰와 같은 원고는 종종 써왔지만, '감성충천소'라는 달달한 꼭지에 에세이를 쓰려니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마감은 매주 월요일! 이것 때문에 주말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많았다. 또 웹진이라 실시간 댓글이 달리는 것도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꼼수로 한 달에 한 번은 내 글 대신 독자에게 선물을 주는 코너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즐겁기도 했다. 지면에서만큼 나는 '대리'가 아니라 '작가'였으니까. 나는 글 쓰는 게 즐겁다. 감성충전소 운영 기획안을 작성하며 '직장인이 공감할 이야기' '비즈니스 이야기' '유머 있는 이야기', 이 세 범주 안에 드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1년이 지나, 내 글을 돌아보니 가장 반응이 좋았던 글은 세 가지 범주와는 좀 빗겨난 '내 이야기'를 쓴 글이었다. 부모님은 작가가 되려면 경험이 많아야 한다고 했는데, 경험보다는 기억력이 좋은 탓에 써먹을 수 있는 글감을 잘 간직해왔던 것 같다. 



기억의 보따리가 점점 가벼워질 때쯤, 작가에서 대리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지난 1년간 댓글을 남기고, '좋아요'를 눌러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 기억 역시 소중하게 가지고 있다가 언젠가 글로서 그 마음을 풀어놓을 것이다. 그때의 글 제목은 '감사'이리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