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해정 Dec 28. 2018

신은 약속을 지킨다

믿음도 운명도 나에게 있다 

2018년이 지나간다. 작년 이맘때 쓴 글을 찾아보니 <글로벌웹진> 2018년 첫 호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주제는 '속설'이었다. '미신'이 더 합당한 칼럼이 모여 있었지만, 미신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어 속설로 바꾸었다. 미신이나 속설이나 과학적 근거의 여부를 떠나 나쁜 일을 막고 행운을 기원한다. 미신을 속설로 바꾸니 어쩐지 구수하고, 지혜로워 보이는 듯하다. 


연말연시가 되면 많은 사람이 점을 보러 간다. 대학가에는 타로를 보는 노점이 성업이다. 서울대공원 근처에는 아직도 관상과 손금을 보는 할아버지 무리가 있을까.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갔다가 친구와 쭈뼛쭈뼛 지폐를 내밀고 ‘손금을 봐 달라’고 한 적이 있다. 손금 풀이 대신 '공부 열심히 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대학생이 되어 제대로 된 첫 점을 보았다. 학교 축제에 타로를 보는 분이 왔던 것. 진로에 대해 물었는데 나에게 ‘군인 체질’이라고 했다. 친구들이 웃었다. 나 같이 놀기 좋아하는 애는 군인하기 어렵다고. 나도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군인’이라는 말보다 ‘체질’에 방점을 찍었어야 했다. 효율적인 매뉴얼을 좋아하고 규칙적인 생활에서 삶의 만족을 얻는 나는, 직업으로만 따진다면 군인과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사주풀이는 몇년 전 처음 접했다. 홍대입구역에서 상수역으로 걸어가고 있던 때였다. 주차장거리를 지나는데, 한 아저씨가 나를 잡았다. 


영등포에 유명한 선생님이 있으신데, 
젊은 사람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듣고 싶어서 홍대에 출장을 오셨어요. 
사주 한 번 봐요. 특별히 5,000원에 해드릴테니까. 


약속시간까지 여유도 있고, 호기심도 일어 보기로 했다. 선생님은 공원 정자에 앉아 있었다. 이름과 생년월일, 태어난 시를 말씀드리고 직업운이 궁금하다고 했다. 선생님은 사주에 목(木)이 있으니 교육 계통으로 가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출판도 괜찮다고 했다. 당시 나는 교육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진로를 잘 잡았나?’ ‘안주머니 사직서는 계속 넣어둬?’ 별생각이 다 들었다.


내 직업을 맞춘 것만으로도 신뢰도 100. 

주머니에 있던 돈을 다 드려서라도 진로에 대해 더 묻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사주풀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포구청에서 신고를 받고 거리의 불법영업을 단속하러 나왔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호객하던 아저씨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해야만 했다. 민망하게 서 있다가 5,000원을 얼른 드리고 떠나야만 했다.



신은 약속을 지킨다

뜨뜻미지근한 첫 점에 아쉬움이 컸는지, 친구들과 직장 동료에게 물어 ‘용한 사람’을 수소문했다. 부모님께도 혹시 아시는 분이 있냐고 물었는데, 엄마가 조금 이외의 대답을 해주었다. 


용하다고 소문난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앞날이 궁금하면 신을 모시는 아무나 찾아가라.
대신 좋은 말만 해달라고 하라.
당장 내일 죽는 팔자라고 해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먼저 말하라.

왜냐하면 신은 약속을 지키기 때문이다.

신은 자신을 따르는 이의 말을 들어준다.
무속인이 '너는 아플 것'이라고 말하면, 신이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진짜 너를 아프게 만들 것이다.
'걱정할 일이 없다'는 말을 하면, 신은 정말 걱정할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이다.
신은 자신을 따르는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어준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무속인이 점을 보는 장소엔 늘 제사음식이 함께 있다. 자신에게 지극정성 제를 지내는 무속인이 기특해 신은 그의 말을 약속으로 알고 들어준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은 엄마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리라 믿기에 이런 말을 했으리라.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신이라면 나를 모시는 사람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다시 작년에 쓴 글을 돌아본다. 2017년을 보내며 내가 읽은 글이 있었다. 2017년 퍼블리의 마지막 뉴스레터. 뉴스레터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졸업식사를 인용한 글이다. 


삶을 스스로 평가할 때의 기준은
성공이나 실패, 돈을 벌었나, 못 벌었나가 아니라
좋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2018년은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멋지진 않지만 남들이 웃을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었다고. 2019년 만들 스토리에 더 많은 등장인물이 출연하고 더 탄탄한 플롯이 세워지길 희망한다. 여러분의 한 해도 알찬 스토리가 쓰이기를 기대한다. 기대만으로 부족하다면 신에게 기도해도 좋다. 신은 약속을 지킬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늦가을에 부를 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