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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해정 Nov 29. 2018

늦가을에 부를 노래

올해가 가기 전 노래를 외워보자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오후 내내 비가 내려 퇴근 후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 걱정되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야지만 도착하는 곳. 사람들로 빽빽할 지하철 안을 생각하니 대중교통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걸어가면 어떨까 검색해보니 40분이 걸린단다. 창밖엔 비에 젖은 플라타너스가 황량하게 부서져 거리를 채웠다. 완연한 늦가을이다. 그래, 걷자. 


김광균의 '추일서정'은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라는 이 한 연으로 가을을 대표하는 시가 됐다. 국어시간에 배운 이 시는 이렇게 늦가을을 걸을 때, 바닥에 깔린 플라타너스 낙엽을 발로 걷어찰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른다. 도룬 시의 가을은 어떠할지, 서울의 가을은 이러하다고 허공에 화답도 하나 보내게 된다. 


늦가을에 거리를 걷는 일을 좋아한다. 비가 오면 더욱 좋다. 낙엽으로 덮힌 길을 걸으며 잠시나마 숲길을 걷는 기분을 느낀다.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는 꼭 풀벌레의 울음과 닮았다. 고등학교 때 외웠던 시 하나로 와닿는 우울함도 반갑다. 그리고 음악을 듣기에 더없이 좋다. 멋진 곡 하나로 늦가을 풍경과 하나가 되면서도 나라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다.  



멋진 곡을 찾는 일은 쉽다. 이 거리를 순식간에 예술의전당으로, 홍대 클럽으로, 더블린 거리 버스킹 앞으로 탈바꿈하는데 필요한 것은 휴대폰 하나와 이어폰 뿐이다. 이제는 휴대폰이 아닌 것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스마트폰 제조사는 아예 음악을 듣는 일이 전화나 메시지를 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우연에 기대고 싶을 때는 '추천 음악'을 듣는다. 하루에도 몇 백 곡씩 쏟아지는 세계의 음악 속에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추천 서비스만큼 편한 게 없다. 애플 뮤직은 '포 유'에서 이용자가 어떤 뮤지션을 좋아하는지 어떤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는지 선택하면 일주일 단위로 좋아할 만한 음악을 추천하는데, 만족도가 꽤 높은 편이다. 


어디에도 없는, 나만을 위한 음악을 듣는 것도 머지않아 가능하다. 2017년 여름, 일본의 한 대학과 벨기에의 기업이 공동으로 '작곡 인공지능'을 개발했다. 인공지능 작곡이야 새로울 것은 없다. 이들의 기술이 눈에 띄는 점은 인간의 뇌파를 분석해 기분에 맞는 음악을 작곡한다는 것이다. 만약 인공지능이 1940년대로 가 김광균에게 음악을 추천해준다면 어떤 음악이 나올까? 시인은 그 음악에 감동할까? 



약속에 늦지 않으러 서둘러 걷는 동안, 아쉽게도 이어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아직 비는 멈추지 않아, 사람들은 지하보도로, 차 안으로, 건물 안으로 숨었다. 낙엽길은 더 없이 한적했으나 음악도 없이 홀로 걸어야만 했다. 바람도 부니 노래를 불러보면 어떠려나. 


하지만 떠오르는 곡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멜로디만 기억날 뿐 가사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가요도, 팝송도 처음 몇 소절만에 금방 끊겼다. 가사집을 필통에 두고 외웠던 곡도, 콘서트에서 떼창하려고 벼락치기하듯 외운 곡도 후렴구만 생각날 뿐이었다. 


음악을 자주 듣는다고 생각했으나, 그저 '듣기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앨범 두어 개 겨우 저장할 수 있는 MP3의 용량이 언젠가부터 기가 단위로 늘면서 모든 곡을 넣어두고 랜덤으로 플레이했다.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4G 이후엔 스트리밍으로 '말 그대로' 끝없이 새롭게 플레이되는 음악을 들었다. 추천 음악도 마찬가지. 날 위한 노래라곤 하지만, 내가 고르지 않은 만큼 뮤지션이나 가사를 찾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노래를 흘러버린 듯하다. 


늦가을이면 생각나는 노래, 반주 없이도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떠오르지 않아 걷는 길이 외로웠다. 올해가 가기 전, 추일서정을 느낄 이 계절이 끝나기 전에, 음악을 듣지 않고도 완창할 수 있는 노래를 하나 정하려고 한다. 당분간 출근길에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시를 노래했던 마음으로 가사를 외워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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