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윤리가 근대 경제 윤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독일의 역사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이 책에서 서구에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되고 확산되는 데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윤리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는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돼 나온 교파를 통칭하는 말이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종교 개혁의 주역 루터가 로마 가톨릭 세력에 저항(protest)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기존 가톨릭을 구교, 프로테스탄트를 신교라고 부르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가톨릭과 개신교라고 부르고, 통상 ‘성당 다닌다(가톨릭)’와 ‘교회 다닌다(개신교)’로 구분한다. 이 책(한글 번역본)에서도 본문에서는 프로테스탄트 대신 주로 개신교라고 지칭한다.
처음에는 이 책이 자본주의 자체가 개신교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는데 아니었다. 베버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세계 도처에서 나타난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와 자신이 이 책에서 주로 다루려는 ‘근대 자본주의’를 구분한다. 베버가 말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시장에서 재화를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다.
기업 활동과 가사 활동이 분리된다.
복잡한 회계 방식이 발달한다.
노동과 작업장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된다.
노동자들이 법적으로 자유민이다.
기업들이 이윤의 극대화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이렇게 우선 자신이 다루려는 자본주의를 형태 관점에서 다른 자본주의와 구분한 뒤 이것만으로는 ‘근대 자본주의’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면서 ‘경제 윤리’ 이야기를 꺼낸다. 베버는 위 형태를 뒷받침하는 어떤 경제 윤리에 관한 설명이 추가돼야 비로소 근대 자본주의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 ‘경제 윤리’가 이 책에서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이다. 사람(예를 들어 나 같은)에 따라서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표현보다는 ‘근대 경제 윤리’라고 표현하는 게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서두에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이 개념의 실체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논문의 목적이어서, 이 논문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이 개념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넘어간다. 이 책을 잘 이해하려면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과연 자본주의 정신이란 게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지만, 아쉽게도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도 바로 명확하게 답변하기 힘든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쉽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베버의 설명 방식에 있다. 베버는 마치 조각상을 조각하듯 설명한다. 자본주의라는 덩어리를 모두가 이해하고 있다고 가정한 후에 자신이 생각하는 자본주의 정신(근대 경제 윤리)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정으로 하나씩 쳐 나가면서 자본주의 정신을 조각해 나가는데 조각을 시작할 때의 모습도 잘 모르고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이 될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따라가는 게 조금 벅찼다. 만약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책 뒤표지에 적힌 요약과 이 책을 옮긴 박문재 님이 작성한 해제를 꼭 정독하길 추천한다. 큰 도움이 되었다.
해제에 따르면, 자본주의 정신이란 ‘개신교 윤리가 탈종교화 또는 세속화돼서 생겨난 가치관, 즉 노동 자체를 목적으로 보고, 직업 노동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일하며, 자본을 불리면서도 부를 누리려고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부를 쌓아가면서, 물질적인 부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표지로 이해하는 가치관’이라고 말한다.
베버는 이 정의에 들어간 각 사항이 개신교의 어느 시점에서 어떤 분파의 어떤 특성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 밝히기 위해 개신교의 역사를 찬찬히 훑어 나가면서 사례 중심으로 하나씩 증명하며 정리해 나간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근대 자본주의가 태동한) 개신교 분파의 역사’라고 책 제목을 바꿔도 무방할 정도로 개신교라는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각 분파의 역사와 특성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베버에 따르면 이런 특성을 모두 갖춘 개신교 종파가 바로 칼뱅주의였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가 꽃을 피운 사회에서 이 칼뱅주의의 흐름을 쫓아가며 자본주의 정신이 개신교 윤리에 영향을 받았음을 증명해 나간다.
베버가 이 책에서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연결하는 핵심 논리로 내세운 것을 다소 거칠지만 아래와 같이 정리해 봤다.
종교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전반은 물론 구성원 하나하나의 정신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던 그 시절 서구의 몇몇 국가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신이 예정한 선택받은 사람인지, 죽어서 천국에 갈 사람인지가 인생 최대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누구도 신에게 명확한 답변을 받을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선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 증거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중 예정론을 믿었던 어떤 무리는 현실의 삶 속에서 구원받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자기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고 다른 이에게 알릴 수 있는 징표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경건하게 삶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며 금욕을 실천하거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이 제시한 공리를 바탕으로 직업을 신이 내린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근면 성실하게 직업 노동에 힘쓰는 행위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하느님이 자신들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작용한다고 믿으며 어느 신자에게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뜻이 있을 것이고, 따라서 독실한 신자라면 당연히 그런 기회를 사용해서 이윤을 획득해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이전에는 올바른 신자의 길이 아니라고 생가했던 이윤 창출 및 누적 행위에 정당성이 부여됐다. 그 결과는 베버의 말을 그대로 옮겨왔다.
이렇게 해서 “시민 계층의 직업윤리”의 전형이 출현했다. 이제 시민 계층의 기업가들은 사업과 관련해서 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고 자신의 행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으며 자신의 부를 비난받을 일에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하느님의 가시적인 복을 확실하게 받으면서 하느님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서 자신의 영리적인 이득을 추구해 나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종교적인 의무가 되었다. 또한 종교적 금욕주의는 노동을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명령한 삶이라고 믿고 거기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냉철하고 양심적이며 높은 노동 생산성을 지닌 노동자들을 시민 계층의 기업가들에게 공급해 주었다.
아울러 종교적 금욕주의는 현세의 재화가 사람들에게 불평등하게 분배되게 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특별한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시민 계층의 기업가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옳다고 확신하고서 안심하고 해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즉, 하느님은 어떤 사람들을 택해 특별한 구원의 은혜를 주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재화를 많이 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재화를 적게 줌으로써, 우리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계획과 목적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베버에 따르면 이와 같이 개신교 윤리를 바탕으로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직업 노동이 조직된 후 시대적으로 종교적 열망이 사그라들고 그 자리를 철저하게 세속적인 공리주의가 차지하면서 근대 자본주의가 완성됐다.
역사사회학자였던 베버가 근대 자본주의의 형태를 정의하고 그 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정신을 정의하려고 시도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에서 종교적 열망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공리주의가 차지했다고 말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기치로 유명한 공리주의는 어떤 행위가 옳고 그른지를 해당 행위가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얼마나 늘리는가로 판단하는 사상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직업 노동이라는 가지는 그대로 둔 채 신과 내세에 대한 지극한 열망이라는 뿌리가 인간과 현세에 대한 지극한 열망이라는 뿌리로 교체된 것이다.
이 책에서 이 교체 과정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금욕주의와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 덕분에 쌓인 부가 역설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현세에 집착하게 만들면서 자본주의 정신을 지니고 있던 이를 ‘타락’시켰다는 사례를 짤막하게 소개하기는 하는데 이런 현상이 종교적 열망이 공리주의로 교체된 이유나 동력이라고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지는 않는다.
아무튼 이와 같이 변한 자본주의에 대해서 베버는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했다. 1905년의 우려이지만 오늘 신문에 이런 사설이 실렸다고 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내용이다.
삶을 전문화되고 특화된 노동에 바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파우스트처럼 다차원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이렇게 전문화되고 특화된 과업을 “행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청교도들은 직업에 전념하는 인간이 되기를 “원했던” 반면에, 우리는 그런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청교도적인 금욕주의는 신자들을 수도원의 골방에서 끌어내어 세속적인 직업 생활로 집어넣어서 세속의 도덕을 지배함으로써, 공장과 기계를 기반으로 한 생산과 관련된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조건들과 연결된 근대적인 경제 질서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세계를 건설하는 데 기여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오늘날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영리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 태어나서 편입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가해 그들의 삶을 자신이 필요로 하는 생활양식으로 주조해 내고 있고, 마지막 화석 연료가 다 타서 없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금욕주의가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면서, 재화는 점점 더 강력한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됐고, 결국에 인간이 그 힘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게 돼 버렸는데, 이것은 이전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인간이 갇혀 있는 이 쇠창살 안에서 금욕주의는 사라져 버렸고,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일지, 아니면 영속적으로 이어질 현상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쨌든 이제 역사 속에서 승리해서 하나의 강력한 틀과 기제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자본주의는 금욕주의라는 지지대가 필요하지 않다.
미국처럼 영리 추구에 부여돼 있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의미가 거의 완전히 사라진 지역에서는, 영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순전히 “경쟁욕”과 결부돼 마치 스포츠를 하는 것 같은 특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
미래에 누가 이 쇠창살 안에 갇혀서 살아가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이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발전이 끝나갈 무렵에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새로운 예언자들이 출현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옛 사상과 이상이 다시 부활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인지, 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자포자기 상태에서 극도의 자존감으로 장식된 기계적이고 화석화된 인류가 출현하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만일 화석화된 인류가 출현하게 된다면, 인류의 이러한 기나긴 문화 발전의 과정에서 “인류의 마지막 단계에 선 최후의 인간들”인 “마지막 인류”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이 참이 될 것이다. “혼이 없는 전문가들, 심장이 없이 향락을 추구하는 자들 - 이 무가치한 인간 군상들은 인류가 지금까지 도달한 적이 없는 수준을 자신들이 올라갔다고 착각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문제라고 생각한 현상이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역사사회학자다운 방법으로 현상의 근원을 파헤친 베버의 선택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자칫 뜬구름 잡는 끼워맞추기식 주장이 될 수 있는 얘기인데 개신교 역사 실록이라고 해도 될 만큼 방대하게 모아서 상세하게 분석해 놓은 관련 자료가 베버의 주장에 무게를 더하며 현실로 끌어내려 힘을 실어준다.
물론 베버 본인도 오로지 개신교 윤리 하나가 근대 경제 윤리를 탄생시킨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어느 시대의 “역사적 행위를 추진한 요인” 또는 “진정한 추동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유령들은 실제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지만, 그럼에도 현상이 발생하는 데 어느 정도라도 영향을 끼친 요인을 알게 되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방책을 강구하는 데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정의한 자본주의 정신의 큰 기둥 중 하나인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된 직업 노동이 맺은 훌륭한 결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는 베버가 논문을 발표한 뒤 받은 비판에 대한 반박까지 실려있는데 베버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재밌는 부분이 많아서 두 부분을 발췌해 왔다.
나는 나의 비판자가 나로 하여금 그런 필요성을 인식시켜 준 데 대해서 감사하지만, 꼭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무한하게 복잡한 인과관계가 뒤엉켜 있는 이 분야에서는 1차 자료들에 대한 철저한 지식 없이는 실제로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없는 법인데, 나의 비판자는 그런 지식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남의 글을 비판할 때에 “예의를 갖춰 공손하게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오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의 비판자는 나를 비판하면서 나의 글을 칭찬하는 말도 잊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가 오만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자격 없는 사람이 하는 칭찬은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그 점에서 나는 전에 비슷한 상황에서 크납이 이렇게 한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누가 자신의 글에서 나를 당나귀라고 말한다면, 나는 분명히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내가 당나귀가 아니라고 꼭 쓰고 싶다고 느끼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