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 안빈낙도라기보다는 독야청청
이 책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사람이 인적이 드문 월든이라는 호수 근처에 직접 집을 짓고 약 2년 6개월간 살면서 그 당시 자신의 삶의 모습과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한 에세이다.
책의 콘셉트를 알고 나면 언뜻 인기 있는 TV 콘텐츠 ‘나는 자연인이다’가 떠오른다. 실제로 이 책을 읽고 홀홀 자연의 곁으로 떠나 자연인으로 살아보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렇게 만든 힘은 단연 소로라는 사람의 매력일 것이다. 월든 호수만큼이나 깨끗하고 깊은 소로라는 사람의 매력이 책 전반에 물씬 배어 있다. 건강한 육체에 깃든 올곧은 생각과 단단한 내면을 기반으로 삶에서 자연스럽게 자신감을 발산하는 소로가 건네는 말을 듣다 보면, 그가 자연과 인간 사회를 대하는 태도와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나도 그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고, 산정 호수나 팔당호 근처에 집을 짓고 최소한의 삶을 살며 삶의 본질을 마주하고 싶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좋아 보이긴 하는데 요즘에는 저렇게 살기 힘들지’, ‘나도 한 번 해보고 싶긴 한데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 ‘요즘에는 아무 데서나 저렇게 살면 잡혀가’라는 생각을 했다면 당신은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아직 소로가 하는 말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차라리 ‘나는 아직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아 있어’, ‘난 이쪽의 삶이 더 좋아’, ‘나라는 사람은 어느 정도 자연을 희생하더라도 편의와 사치를 포기할 수 없어’, ‘모든 생물은 살면서 자연을 소비하기 마련이고, 난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해’라고 답하는 게 맞다. 소로의 생태주의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이런 답이 나와야 한다.
대세를 따라 의무감으로 말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그대로 적시에 제대로 표현하는 삶. 리스크에 겁먹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자기도 모르게 질질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기꺼이 리스크를 껴안고 스스로 결정하고 계산한 뒤 실행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삶. 소로는 이 책에서 이런 삶의 방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알려준다. 생태주의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를 소로와는 다른 방법으로 구현하면 된다.
이 책은 생태주의라는 주제를 빼도 건질 것이 아주 많은 책이다. 물론 책의 많은 분량이 월든 호수와 그 주변의 자연을 묘사하는 데 할애된다. 따라서 그런 자연 묘사에 큰 관심이 없다면 중간중간 조금 지루할 수는 있다. 만약 나와 같이 생태주의에 큰 관심이 없음에도 이 책을 골랐다면, 그런 부분은 너무 깊이 읽지 말고 적당히 가볍게 읽으며 책장을 넘기는 것을 추천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시 깊은 사색의 결과물을 마주할 수 있고 자기도 모르게 집중해서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다시 이 독서록을 찾아볼 나를 위해 책 순서대로 기억에 남는 것들을 모아봤다.
먼저 상황. 저자가 묘사하는 당시 매사추세츠 주의 상황이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하다. 빈부격차와 부동산 문제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것 같다.
만약 문명이 인간 상황의 진정한 발전이라고 주장한다면(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단 현명한 사람들만이 그 이점을 최대로 활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문명은 비용을 더 들이지 않고 보다 훌륭한 주택을 마련하였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비용이라는 것은, 당장에 혹은 궁극적으로 사려는 그 물건과 바꾸어야 할 ‘생명의 양’을 말하는 것이다. 이 근처의 일반 가옥은 대략 800달러 정도인데 그만한 돈을 모으자면 부양가족이 없는 노동자라도 10년 내지 15년이 걸릴 것이다. 이 계산은 노동자의 하루 수입을,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평균 1달러로 따진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자기의’ 오두막을 마련하려면 생의 반 이상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가 집을 마련하는 대신 세를 사는 것을 택하더라도 상황이 더 나아진다고 볼 수 없다.
집을 마련하고 나서 농부는 그 집 때문에 더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실은 더 가난하게 되었는지 모르며, 그가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그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한 계급의 호화로운 생활은 다른 계급의 궁핍한 생활로 균형이 맞추어진다. 한편에 궁전이 있으면 다른 편에는 빈민 구제 시설과 ‘말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두 번째는 계기. 위와 같은 상황에서 당시 사람들이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한 소로는 하루의 본질, 인생의 본질을 직면해 보고자 1845년 3월 말경, 도끼 한 자루를 빌려 들고 월든 호숫가의 숲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끝없이 노력하고, 때로는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지 않을 것인가?
인간은 이제 자기가 쓰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우리의 발명품들은 흔히 진지한 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예쁘장한 장난감일 경우가 많다. 그것들은 ‘개선되지 않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개선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목적이란 기차가 보스턴이나 뉴욕에 쉽게 도착하듯이 시 신발명품 없이도 너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이다.
피라미드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떤 야심만만한 멍청이의 무덤을 만드느라고 자신들의 전 인생을 허비하도록 강요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차라리 그 작자를 나일 강물에 처박아 죽인 후, 그 시체를 개들에게 내주는 것이 더 현명하고 당당했으리라.
어떤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일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같이 보인다. 또는 일을 하지 않으면 나쁜 길에 빠지니까 일에 몰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현재로서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으며,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는 원치 않았다. 나는 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고 엄격하게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수풀을 폭넓게 잘라내고 잡초들을 베어내어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 간 다음에,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압축시켜서 그 결과 인생이 비천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 비천성의 적나라한 전부를 확인하여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리며,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이라면 그 숭고성을 스스로 체험하여 다음 여행 때 그에 대한 참다운 보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호숫가 삶의 풍경. 소로는 이 책에서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지은 방법과 집의 모습,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등을 자세히 묘사하는데 그것들이 합쳐져 고요하고 여유로운 삶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 당시 내가 생활했던 것처럼 소박하게 산다면 절도나 강도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일부 사람들이 충분한 정도 이상의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하여 다른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도 갖지 못한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정말로 부유했다. 금전상으로가 아니라 양지바른 시간과 여름의 날들을 풍부하게 가졌다는 의미에서 그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들을 아끼지 않고 썼다. 그 시간들을 조금 더 공장이나 학교의 교단에서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소로가 집을 짓는 과정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처음 집을 지을 때부터 겨울을 대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3월 말에 호숫가에 들어온 그는 일단 그 계절에 살 수 있는 정도로만 집을 지은 뒤 그 집에서 그 계절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즐기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비로소 바람을 막고 불을 땔 수 있는 집으로 업그레이드한다. 그야말로 아래와 같은 자신의 말을 삶 속에서 그대로 실천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나중에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아준다고 하면서, 내일의 아홉 바늘 수고를 막기 위해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다.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병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귀가.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2년을 산 뒤 다시 사회로 돌아온다. ‘월든 호숫가에서 최대한 자급자족하며 잘 먹고 잘 살았다’로 끝나지 않고 결국 그곳을 떠나 다시 북적대는 인간 사회로 돌아왔다는 결말이 이 책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생각한다.
1847년 9월 6일 나는 드디어 월든을 떠났다. … 나는 숲에 들어갈 때나 마찬가지로 어떤 중요한 이유 때문에 숲을 떠났다. 내게는 살아야 할 또 다른 몇 개의 인생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꼈으며, 그리하여 숲 생활에는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나는 선실에 편히 묵으면서 손님으로 항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인생의 돛대 앞에, 갑판 위에 있기를 원했다. 나는 이제 배 밑으로 내려갈 생각은 없다. … 나는 실험에 의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을 배웠다. 즉 사람이 자기 꿈의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자기가 그리던 바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 그는 과거를 뒤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을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변과 내부에 확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묵은 법칙이 확대되고 더욱 자유로운 의미에서 그에게 유리하도록 해석돼 그는 존재의 보다 높은 질서를 허가받아 살게 될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생활을 소박한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질 것이다. 이제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빈곤도 빈곤이 아니며 연약함도 연약함이 아닐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공중에 누각을 쌓았더라도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누각은 원래 공중에 있어야 하니까. 이제 그 밑에 토대만 쌓으면 된다.
앞서 말했듯 월든 호숫가에서의 생태주의적 삶이란 수 없이 많은 인생 방향 중 한 가지 방향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이 단순한 시간의 경과만 가지고는 결코 동트게 할 수 없는 저 아침의 성격인 것이다. 우리의 눈을 감기는 빛은 우리에겐 어두움에 불과하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날만이 동이 트는 것이다. 동이 틀 날은 또 있다. 태양은 단지 아침에 뜨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것은 방향이 아니라 방법이다. 또한 그 방법을 먼저 실천하고 그 기록을 남김으로써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내게 공감해 주고 있는 역사적인 현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로가 살았던 시대와 다를 것 없이 현대 우리나라에도 스스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품위를 망쳐놓고 그 결과로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비천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마치 엉겅퀴나무를 다루듯 인생을 거칠게만 다루려고 하면서 결국 엄청나게 불리한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을 가장 둔한 통찰력에 내려 맞추고는 그것을 상식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직 눈앞의 이익과 때려먹는 잔치에만 관심을 두고 농업의 여신이나 대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지옥의 황금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탐욕과 이기심이라는 누구나 벗어나지 못하는 천한 습성’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은 사람을, 홀로 독야청청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걸어 나갔던 사람을 한 명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이 책에서 얻은 또 하나는 이 책에 적힌 소로의 생각 중 일관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일을 ‘철도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 상업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감에 넘치고 차분하며, 기민하고 모험적이며 지칠 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상업은 그 방법에서 매우 자연스럽다. 허다한 공상적인 기획이나 감상적인 실험들보다 그 방법이 훨씬 자연스러우며, 바로 거기에 그 특유의 성공 비결이 있다. 화물열차가 덜커덕거리며 내 옆을 지나갈 때면 나는 기분이 상쾌해지고 마음이 뿌듯해진다. 나는 보스턴의 롱 부두에서 버몬트 주의 샘플레인 호수까지 내내 냄새를 풍기면서 가는 화물들의 냄새를 맡는데, 그 냄새는 나로 하여금 이국의 땅들과 산호초와 인도양과 열대의 풍토와 지구의 넓이를 생각게 한다. 내년 여름에 수많은 뉴잉글랜드 지방 사람들의 금발 머리를 가려줄 모자가 될 종려나무 잎들 그리고 마닐라 삼, 코코야자 껍데기, 낡은 밧줄, 마대, 고철과 녹슨 못들을 보면 세계의 시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귀청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로 온 마을을 뒤흔들어놓는 저 악마 같은 철마는 발굽으로 보일링 샘을 짓밟아 그 물을 더럽혀 놓았다. 월든 호숫가의 숲을 죄다 갉아먹은 것도 저 철마이다. 돈에 눈이 어두운 그리스인들에 데리고 온 이 철마는 그 뱃속에 적병 1천 명을 숨기고 있다. 기 거만한 괴수를 계곡에서 맞이하여 그의 갈비뼈 사이에 복수의 창을 깊숙이 꽂을 무어홀의 무어 같은 이 나라의 용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소로가 만약 자신의 생각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매달렸다면 월든이라는 책은 어떻게 변했을까. ‘당신이 의무감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지 말고 진실로 내부에서 느끼는 것을 말하라. 어떤 진실도 거짓보다는 낫다.’는 소로의 말과, 얼마 전에 회사 동료가 알려준 ‘Done is better than perfect’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소심한 사람들에게는 평생의 화두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