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미래 철학, 힘에의 의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나서 니체의 다른 책도 읽고 싶어졌고, 이 책과 ‘우상의 황혼’과 ‘안티 크리스트’ 중 고민하다가 이 책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해석본 격이라는 평(나무위키 선악의 저편)을 보고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은 ‘차라투스트라…’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온갖 비유를 통해 마치 암호문처럼 산문시 형식으로 풀어냈던 내용을 니체 자신이 직접 나서서 평문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 책의 매력은 니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비유나 상징 같은 껍질 없이 알맹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니체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펼치는 논리를 직접 따라가면서, 니체 이전에 세상을 지배했던 여러 철학들이 니체가 보기에는 어떤 오류나 약점이 있는지 다소 화난 듯한 니체의 어조로 직접 들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기억에 남았던 몇 가지를 두서없이 정리해 봤다.
니체는 이 책에서 도덕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니체는 도덕을 크게 노예도덕과 주인도덕으로 나누고 있다. 노예 도덕의 가치 기준은 선과 악인 반면에, 주인도덕의 가치기준은 탁월함과 저열함이다.
니체는 노예도덕의 득세를 경계했다. 억압받고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며 자신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해 늘 피로에 지쳐 있는 자들이 추구하는 도덕, 고통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도덕, 어떤 식으로든 생존의 압박인 고통 그 자체를 삶에서 삭제하려는 도덕, 연민과 온정, 인내심, 근면성, 겸손, 친절을 내세우는 도덕.
니체는 이런 도덕이 득세하면 인류 전체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니체가 보기에 이런 도덕은 앞서 나가며 인류의 진보를 이끄는 승자를 증오하고 끌어내리려고 할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었다. 노예 도덕은 권력, 위협적인 것,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 세련된 것,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 등을 악한 것으로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차이는 증오를 낳는다. 우리와 본성적으로 다른 것을 우리는 증오한다.
이런 관점에서 니체는 당시 유럽에 퍼지고 있던, 탁월한 소수가 아닌 평범한 다수를 위한 철학과 체제인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확산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며 경계했다.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경계 너머로 나아갈 권리를 스스로 거부하느라 애쓰는 철학, 그것은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는 철학이고, 종말에 다다른 철학이며, 단말마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철학이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다. 그러한 철학이 어떻게 지배할 수 있겠는가!
니체는 노예도덕이 아니라 주인도덕이 득세하기를 바랐다.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여서 자기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도덕.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도덕, 다소 위험과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기꺼이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용기를 갖춘 도덕.
중간중간 잠언 형식으로 툭툭 내뱉어 놓은, 명언집에 나올 법한 글들이 많이 실려 있는데 이 또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읽으면서 니체란 사람의 단면을 하나씩 알 수 있었고, 그런 짧은 글들에도 니체의 통찰력이 잘 배어 있어서 시대를 초월해 공감할 수 있었다. 그중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만 옮겨왔다.
젊은 시절에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훌륭한 수확물인 뉘앙스의 기교를 알지 못하고 [인간이나 사물을 무조건적으로] 존경하거나 경멸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인간과 사물을 긍정과 부정으로 공격한 것에 대해서 당연히 톡톡히 값을 치러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감정에 어느 정도의 기교를 부여하는 것을 배우고 인생의 대가들처럼 기교적인 것을 시험 삼아 감행하는 것을 배울 때까지는, 모든 취미 가운데 최악의 취미인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취미로 인해 처참하게 조롱을 받고 학대를 받아야 한다. 청년 특유의 분노와 숭배의 태도는 인간과 사물을 그러한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출구로 이용함으로써 인간과 사물을 왜곡시키기 전에는 결코 진정되지 않는다. 젊음은 그 자체로 이미 왜곡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나중에 수많은 환멸에 시달린 젊은 영혼이 마침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게 되고 난폭하고 열렬한 의혹과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될 때, 그는 이제 자신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인류애는 ‘진리’와 진리의 추구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를 너무 인간적으로 추구한다면 - ‘선을 행하기 위해서만 진리를 추구한다’면-단언컨대 인간은 어떠한 진리도 발견하지 못한다.
행복이나 덕은 [어떤 학설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논거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사려 깊은 사람들조차도 불행하고 악하게 만든다는 것이 [어떤 학설의 거짓됨을 입증하는] 반대논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어떤 것은 극도로 해롭고 위험한 것일지라도 진리가 될 수 있다.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다. 이로 인해 그 밖의 모든 사람은 무시되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보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이는 손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제대로 관찰한 사람이 아니다.
한 인간이 지닌 성욕의 정도와 성질은 그의 정신의 맨 꼭대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호전적인 인간은 평화 시에는 자신을 공격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체험들을 기반으로 사람들은 서로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며, 그러한 체험의 축적에 비례해서 갈수록 더 신속하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언어의 역사는 단축의 역사다. 이렇게 이해가 신속해짐에 따라서 사람들은 갈수록 더욱더 긴밀히 결합하게 된다. 위험이 증대될수록 행동방침에 대해서 사람들이 신속하게 합의해야 할 필요성도 더욱 커지게 된다. 위험한 상황에서 서로를 오해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의 관계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우정이나 사랑에도 적용된다. 두 사람이 동일한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 말과 관련해서 서로가 달리 느끼고 생각하고 추측하고 바라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마자 우정과 사랑은 지속될 수 없게 된다. 어떤 영혼에서 어떤 감각군이 가장 빨리 깨어나고 발언권을 갖고 명령을 내리는지가 그 영혼이 지향하는 가치들의 전체적인 위계질서를 결정하며 그 영혼의 재산목록을 결정한다. 한 인간이 내리는 가치평가는 그의 영혼이 갖는 구조의 일부를 드러내주며 그 영혼이 무엇을 자신의 삶의 조건과 자신의 참된 곤경으로 보는지를 드러내준다. 유사한 기호로 유사한 욕구와 체험을 전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옛날부터 동일한 곤경에 의해서 서로 가깝게 된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쉽게 전달될 수 있는 곤경, 즉 궁극적으로 단지 평균적이고 비속한 체험이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해 온 모든 힘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이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온갖 상징과 비유가 등장하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암호문에 단 하나의 정답 평문만 남겨야 한다면 그것은 물론 이 ‘선악의 저편’일 테지만, 긴 시간 살아남은 ‘차라투스트라…’라는 책은 이미는 니체의 손을 떠나 읽는 사람 모두가 자기만의 해석을 할 수 있는 여러 정답 평문이 존재하는 책이 됐다고 생각한다. 의뭉스럽게 던져놓은 비유 때문에 독자가 작가의 생각을 넘어 행간의 의미를 스스로 짐작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그 덕분에 원래 작가가 의도했던, 작가가 전달하려고 했던 생각과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공감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니체가 이 책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매력으로 끊임없이 독자를 끌어들일 것이다.
어떤 이론에서 그것이 반박될 수 있다는 것은 진실로 적지 않은 매력이다. 그 이론이 반박될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보다 치밀한 두뇌들이 그 이론에 끌리게 되는 것이다. ‘자유의지’ 이론이 수백 번이나 반박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오직 이런 매력 때문인 것 같다. 항상 거듭해서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 그 이론을 반박함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확인하는 것이다.
니체에게 도대체 초인이 돼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묻고 싶을 수 있다.
왜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되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해야 하는 것인가. 이미 인류는 누구도 굶어 죽지 않고 먹고살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발전이 아니라 분배인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와 같이 ‘분배가 문제’라고 인식하려면 인류에게 공동 목표라는 것이 있고 그 목표가 ‘최대 다수의 생존’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목표는 ‘최대 다수의 생존’이 아니었다. 애초에 인류에게 공동 목표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인류에게 공동이라는 표현을 붙일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어떤 능력을 갖추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인간이며, 따라서 서로 다른 대접을 받으며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게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니체는 왜 초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초인이 돼 무엇을 하려는 것이었을까? 니체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힘에의 의지’가 될 것이다.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에는 초인이 된 다음 ‘무엇을 해야겠다’라는 목적이 없다. 끊임없는 자기 혁신과 발전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삶이고 세상의 근본 원리이자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가정한 것처럼 설령 한 조직체의 내부에서 개인들이 서로를 동등하게 대한다 하더라도-이것은 건강한 모든 귀족체제에서 행해지고 있지만-그 조직체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서는 삼가는 모든 행동을 다른 조직체에게 행해야만 할 것이다. 그 조직체는 힘에의 의지의 화신이 되어야만 하며, 성장하면서 주변에 있는 것을 움켜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겨서 압도하려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는 도덕적인 이유 또는 비도덕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 조직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생은 바로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을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의식은 몹시 꺼리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처에서, 심지어는 과학의 가면을 쓰고 ‘착취적인 성격’이 사라지게 될 미래의 사회 형태에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 귀에는 마치 일체의 유기적 기능이 정지된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약속과 다름없는 것으로 들린다. 착취란 부패하고 불완전하고 원시적인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기체의 근본적인 기능으로서 살아 있는 것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의지 자체인 본래의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론으로서는 혁신적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모든 역사의 근본적인 사실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니체의 주장에 반감이 들더라도 눈을 뜨고 현실을 바라보면 니체가 비판하고 배척하려고 했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사회조차 대부분 니체의 말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안타까운 일로 봐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이 책에서 발견한, 요즘 우리 사회에 딱 어울리는 문장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겠다.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통상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