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
이 책은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여러 버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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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895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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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버전의 번역 평이 어떤지 잠깐 검색해 봤지만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지 못해서 그냥 표지가 마음에 드는 책으로 추려내니 펭귄 클래식의 공산당 선언과 책세상의 공산당 선언이 남았다.
펭귄 클래식의 공산당 선언 표지에는 이 책에서 주장하는 폭력적인 혁명에 어울리는 그림이 들어가 있다. 독서록을 쓰면서 다시 봐도 책과 참 잘 어울리는 인상적인 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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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르지 않은 이유는 그림 속 독일 국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독일 사람이며 11월 혁명과 동독이라는 역사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2차 세계 대전에서 공산주의 국가와 싸운 나치 독일 혹은 베를린 장벽을 허문 뒤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강력한 공업 국가로 성장한 통일 독일이 더 크고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책 대신 이진우 님이 번역하고 책세상에서 출판한 공산당 선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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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들어오는 강렬한 빨강. 거기에 오각별. 공산당 선언을 읽는 기분이 제대로 날 것 같았다.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아 비교는 어렵지만 번역도 좋았다. 어색한 번역 때문에 막히는 부분은 없었다.
책은 얇다. 190페이지다. 그 얇은 책 중에서 실제로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더욱 얇다. ⅓ 정도 되는 것 같다. 나머지는 마르크스가 이 사상에 대해 작성한 FAQ와, 선언문이 책으로 발행될 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시기별 혹은 지역별로 작성했던 서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번역가의 해제가 꽤 긴 분량으로 들어가 있다.
번역자가 책 서두에 적어 놓은 것처럼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떠돌고 있는 유령’의 오리지널을 읽어보고 싶어서 구매했다. 비록 실패한 이념이라고 해도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돼 역사적으로 수많은 ‘프롤레타리아’는 물론 공부 좀 했던 지식인까지 사로잡고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상 아닌가. 그 사상을, 단편적이고 변질되고 왜곡된 버전이 아니라 원류로 맛보고 싶었다.
다 읽고 나서 머리에 남은 다섯 가지를 기록해 놓으려고 한다.
첫 번째는 “현실 자체에서 이념을 찾겠다”는 마르크스의 말. 마르크스가 젊은 날 자신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 적혀 있던 말이라고 한다. 유물론이라는 어려운 말을 아주 쉽게 풀어쓰면 바로 이 말이지 않을까.
두 번째는 마르크스가 정의한 프롤레타리아 혹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이 생각보다 상당히 좁다는 점. 예를 들어 농부나 소상인, 수공업자는 마르크스가 정의한 프롤레타리아에 속하지 않았다.
아래는 공산당 선언문 뒤로 이어져 나오는 ‘공산주의의 원칙’이라는 파트에서 발췌해 온 것이다. ‘공산주의의 원칙’은 마르크스가 자주 질문을 받았거나 사람들이 궁금해할 것 같은 질문을 모아 FAQ 형식으로 정리해 놓은 것인데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공산주의는 무엇인가?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조건에 관한 교의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트는 생활비를 어떤 자본의 이윤에서 얻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얻는 사회 계급으로서, 그들의 안녕과 고통,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들의 전체 실존이 노동에 대한 수요, 다시 말해 경기의 좋고 나쁜 변화, 고삐 풀린 경쟁의 변동에 좌우되는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한마디로 19세기 노동 계급이다.
위 항목 뒤에 프롤레타리아는 농노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가? 매뉴팩처 노동자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가? 수공업자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가? 등의 항목이 이어진다.
세 번째는 ‘평화 속 점진적 변화’를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단정하고 ‘폭력을 동반한 급진적 혁명’을 천명하고 있다는 것. 선언문에서 ‘폭력적인’이라는 단어를 명시적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계급으로 단결한다면, 또 혁명으로 지배 계급이 되며 지배 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를 폭력적으로 청산한다면, 그들은 이 생산관계들과 아울러 계급 대립의 존립 조건과 계급 일반을 폐지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계급으로서 자기 자신의 지배까지 폐지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 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공산주의는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피를 기꺼이 볼 각오가 돼 있는 사상이었다. 위 문단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성난 얼굴로 죽창을 든 사람들이 떠오른다. 붉은색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사상이 또 있을까.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없으면 좋겠건만. 안타깝게도 당장 프랑스혁명이나 리틀 보이(혹은 팻 맨)가 떠오르듯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가 극단적인 폭력으로 해결됐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점점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 지불’ 외에 다른 어떤 끈도 남지 않’고 있다. 돈을 벌 수 있고 내 한 몸 편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사회적 윤리나 도덕규범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늘어나고 있다. 그런 몰상식한 사람들 덕분에 기존에는 윤리나 도덕규범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 자꾸 불필요하게 법으로 편입되고 있으며, 심지어 그 법망마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지키면 나만 손해’라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덕분에 더 이퀄라이저나 더 글로리, 비질란테 같은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세상이다. 당장 성인인 나조차 이런 콘텐츠를 보며 쾌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부모나 교사의 입 외에도 수많은 정보 습득 채널을 갖추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과연 언제까지 '사적 제재를 하면 안 된다' 혹은 '폭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택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순순히 따라줄 것인가.
네 번째는 자본주의를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로 인식했다는 것. 즉, 봉건 사회에서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라는 단계를 꼭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 아래 발췌 내용에 잘 드러나 있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적으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지배권을 얻은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가부장제적인 그리고 목가적인 관계들을 모두 파괴했다. 그들은 타고난 상전들에게 사람들을 묶어놓던 갖가지 색깔의 봉건적 끈들을 가차 없이 끊어버렸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 지불’ 외에 다른 어떤 끈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광신, 기사의 열광, 속물적 애상의 성스러운 전율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속에 익사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존엄을 교환 가치로 용해시켰고, 문서로 확인되고 정당하게 획득된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비양심적인 상업 자유로 대체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환상들로 은폐된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꿔놓았다.
부르주아지는 이제까지 존경받으며 경외의 대상이었던 모든 직업에서 그 신성한 후광을 걷어내 버렸다. … 부르주아지는 가족 관계 위에 드리워졌던 감동적이고 감상적인 베일을 찢고 그것을 순전한 금전 관계로 전환시켰다. … 부르주아지는 생산 도구, 즉 생산관계, 다시 말하면 전체 사회관계들을 지속적으로 변혁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낡은 생산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과거의 모든 산업 계급이 생존할 수 있는 첫째 조건이었다. 끊임없는 생산 변혁, 모든 사회적 상태의 부단한 동요, 영구적 불안정과 운동이 부르주아 시대를 과거의 모든 시대와 구분 짓는 특징들이다. 굳고 녹슨 모든 관계 그리고 그 산물인 오래되고 신성한 관념들과 견해들은 해체되었고 새롭게 형성된 것은 굳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신분적이고 정체된 것은 모두 증발하고 신성한 것은 모두 모독당하며, 그래서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 상호 관계를 좀 더 냉철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라는 계급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계급이다. 즉 봉건 사회의 민중이 프롤레타리아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군주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해야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승리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도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독일은 부르주아지와 절대 왕정 간의 결전을 아직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가 지배할 때까지는 부르주아지와의 결정적 투쟁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부르주아지가 가능한 한 빨리 권력을 잡도록 도와주고 다시 곧 이들을 타도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이 원하는 바이다. 따라서 정부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자유주의 부르주아 - 정당의 편을 들어야 하며 부르주아의 자기기만들을 공유하지 않도록 또는 부르주아지의 승리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그들의 유혹적인 확언을 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부르주아지의 승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제공하는 유일한 이점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원칙의 옹호, 토론과 확산을 용이하게 해 주고 그로써 프롤레타리아트가 긴밀하게 연합하여 투쟁의 준비를 갖추고 조직화된 계급으로 쉽게 단합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다양한 허가들과, 절대 정부가 무너지는 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들 간의 투쟁이 시작될 차례가 되었다는 확신에 있다. 이날부터 공산주의자들의 정당 정책은 부르주아지가 현재 지배하고 있는 국가들의 정책과 동일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비록 마르크스가 자신이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문제 제기 자체에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
공산당선언은 크게 문제를 제기하는 파트와 대안을 제시하는 파트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문제 제기 파트와는 달리 대안 제시 파트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 “현실에서 이념을 찾겠다”는 마르크스의 신념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이상적인, 장밋빛 미래만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마르크스가 '공동 책임, 공동 계획, 사회 모든 구성원이 동참하는 경영, 경쟁 대신 연합'과 같은 이상적인 문구를 내세우며 주장한 몇 가지 제도이다.
토지 소유의 몰수와 지대를 국가 경비로 전용
고율의 누진세
상속권 폐지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 압류
국가 자본과 배타적 독점권을 가진 국립 은행을 통해 국가 수중에 신용 대출금 집중
국가의 수중에 운송 제도의 집중
국영 공장의 확대와 생산 도구의 확충, 공동 계획에 따른 토지 개간과 개량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노동 강제, 산업 군대, 특히 농경을 위한 산업 군대 설립
농업 경영과 산업 경영의 결합,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점진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노력
모든 아동의 무상 공공 교육. 현재 형태로 이루어지는 아동의 공장 노동 폐지. 교육과 물질 생산의 결합 등
토지와 생산 수단, 권력 등 모든 것을 국가로 집중하는 제도인데, 이런 제도가 정녕 부작용 없이 잘 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역사적으로 어떤 사회에서든 견제 세력 없이 어느 한 곳에 권력이 집중되면 그 사회는 무조건 독재 테크 트리를 탔다. 마르크스는 나보다 훨씬 더 역사를 잘 알고 있었을 터인데 왜 공산당은 그들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순진했거나 아니면 프롤레타리아 해방이라는 선동 문구 뒤에 숨어 부르주아지가 쥐고 있던 권력을 빼앗아 자신들이 갖고 싶었거나.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반면 문제 제기 파트에서는 읽는 내내 깊이 공감하며 마르크스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제기한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금도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마르크스는 뛰어난 통찰력에 빼어난 문장력을 더해 시대를 초월해 이성과 감성을 두루 자극하는 인상적인 선언문을 만들어 냈다. 아마 우리나라를 비롯해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가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문제인지를 모르거나, 그렇게 믿고 싶지 않거나, 다 알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혜택을 포기할 수 없어서 눈 감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어도 적어도 그 문제에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 실린 FAQ와 시기별, 지역별 서문들도 꼭 챙겨 읽을만하다. FAQ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적당히 요약해 발췌해 왔다. 프롤레타리아가 어떻게 사회에서 차츰 소외돼 가는지 그 과정을 묘사한 부분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산업혁명으로 방적기계와 같은 기계가 생성 > 기계가 더 싼 가격으로 더 좋은 물건을 제공 > 생산 방식 전체를 변화시키면서 노동자들을 몰아냄 > 산업을 온전히 대 자본가들의 손에 넘김 > 노동자들의 얼마 안 되는 재산(도구들, 베틀 등)을 무용지물로 만듦 > 옷감 제조에 공장 시스템 도입 > 이 시스템이 나머지 모든 산업에 응용 > 노동이 잘게 분업화됨 > 전체 공정을 혼자 처리했던 노동자들이 공정의 일부에만 참여 > 분업으로 생산품은 더욱 신속하고 저렴하게 제작 가능 > 분업이 심화되면서 각 노동자의 작업은 기계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게 됨 > 이런 방식으로 모든 산업 부문이 하나씩 차례로 변화하며 공장 시스템의 지배를 받음 > 전체 산업이 자본가의 손으로 넘어감
노동은 다른 모든 상품처럼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그 가격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거대 산업이나 자유 경쟁의 지배하에서 결정되는 한 상품의 가격은,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데 평균적으로 항상 그 상품의 생산 비용과 같다. 다시 말해 노동의 비용은 마찬가지로 노동의 생산 비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노동의 생산 비용은 노동자들이 노동력을 유지하고 노동자 계급이 모두 죽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생활 수단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대가로 이 목적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벌지 못한다. 노동의 비용 또는 임금은 생계에 필요한 최저치 즉 미니멈인 것이다. … 노동 임금의 이런 경제 법칙은 대규모 산업이 모든 노동 부문을 점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엄격하게 실행된다.
IT 산업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자동화라는 말이 이 업계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지를. 이 업계에서는 누군가 어떤 일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꼴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해당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생산 효율을 높이면서 ‘휴먼 에러’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그 업무를 어떻게든 자동화한 뒤 관련 업무에서 ‘휴먼 에러’와 함께 ‘휴먼’도 제거해 버린다.
그 밖에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방향의 화두를 던져준 부분을 발췌해 놓는다.
너희 시민이 생각하는 자유나 교육, 법 등을 잣대로 시민적 재산의 폐지를 평가하면서 우리와 싸우려 하지 말라. 너희의 법이 단지 법률로 끌어올려져 찬양되고 있는 너희 계급의 의지이듯 - 이 의지의 내용은 너희 계급의 물질적 생활 조건 속에 이미 주어져 있다 - 너희의 이념 자체가 시민적 생산관계와 소유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너희는 이해관계에 따른 관념으로 너희의 생산 및 소유관계를 생산 과정에서 거쳐 가는 역사적이고 일시적인 관계에서 영원한 자연법과 이성법으로 변신시키는데, 너희는 이런 관념을 몰락한 모든 지배 계급과 공유하고 있다. … 현재의 가족, 시민 가족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자본에, 사적 영리에, 완벽하게 발전된 형태의 가족은 오로지 부르주아지에게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보충해 주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강요된 가족 부재와 공공 매춘이다.
한 시대에 지배적인 이념은 항상 지배 계급의 이념일 뿐이었다. … 양심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라는 이념들은 단지 지식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자유 경쟁의 지배를 표현할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종종 월든이 떠올랐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마르크스(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와 소로(1817년 7월 12일~1862년 5월 6일)는 이 사회의 같은 지점에서 문제를 찾았지만 서로 다른 방향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소로는 속세를 떠나 자연의 곁에서 홀로 삶의 정수를 찾는 지극히 개인적인 방법을 제시했고, 마르크스는 소외된 모두를 모아 혁명을 일으키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결과는 둘 모두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소로는 2년 만에 다시 사회로 돌아왔고, 마르크스의 혁명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그리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나태, 탐욕, 시기, 질투와 같은 인간 본성과, 태고부터 모든 생물은 종족 번식이라는 사명 아래 다른 개체보다 자신이 돋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개성을 추구한다는 현실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분명 모든 사람이 하나 된 마음으로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살아간다면 자본주의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지만,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얼추 모양만 갖출 수 있을 뿐 태생적으로 전심전력으로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생물이다. 따라서 결국 공산주의 사회는 강제성을 띈 형식적인 사회로 변질될 수밖에 없고, 그런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에는 없던 많은 문제가 만연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많은 국가들이 그런 것처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천국 같이 모두가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나 통할 이념이다. 그런데 그런 곳이라면 이념이나 체제와 같은 사회의 틀이 필요할까? 가만 두어도 알아서 잘 굴러갈 텐데 말이다. 결국 공산주의는 현실에서도, 이상 세계에서도 쓸모없는 사상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는 아직 안녕하지 못하지만 그 해결책이 공산주의는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