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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ott May 07. 2022

게르트루트 1



뜻하지 않게 나는 세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소멸하거나 몰락하지도 않고 세상의 한가운데 그 일원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아, 지난 닷새 동안의 일, 내가 단지 멍하게 느끼고 있던 일, 도망하려 했던 일, 이 모두가 지금 되살아났다. 모두가 불쾌하고, 씁쓸하고, 부끄러웠다. 모두가 죽음의 선고였으나, 나는 그것을 수행하지 않았다. 또다시 미수로 끝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덜커덕거리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나는 창문을 열었다. 캄캄한 대지, 검은 나뭇가지가 앙상해 서러운 듯한 나무, 커다란 지붕 밑의 농가, 먼 언덕 등이 웅크리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모두가 마지못해 존재하며, 고뇌와 반감을 호흡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게는 단지 서글프게만 여겨졌다. 신의 뜻이런가?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 게르트루트 141p



ㅣ.ㅌ.


 그와 나는 4일째 되는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고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익숙한 움직임으로 서로의 일상을 보내었다. 생각해보면 싸우지 않았던 대부분의 날들에도 특별한 대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 어색할 일은 없을거라 예상했고 예상대로 어색함은 없었으나 어색하지 않은 그 자리엔 불편함이 들어섰다. 덕분에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고 시선은 바닥으로만 향했다. 불편한 집이 되었다. 아팠다. 나는 분명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흔한 부부싸움이었지만 날카롭게 서로를 찔러 댔던 말들은 여느 때 보다 깊게 날아와 박혔다. 온몸 구석구석을 돌며 통증을 호소하게 했다.


그와 싸우던 날, 겁을 먹은 아이들의 SOS로 시댁 어른들이 방문했었다. 화창한 5월의 봄, 창문 바깥으로 보다 따뜻한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안과 밖 속 다른 인간의 음흉한 내부처럼 우리의 집 안은 불 꺼진 어둠이 깔렸다. 그가 던진 아이들의 장난감 아크릴 파편이 바닥에 뒹굴며 보이지 않는 뾰족한 위협을 가했고 서로를 향한 갈라진 목소리는 점점 더 높이를 더했다. 그 사이로 불쑥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우리의 싸움은 일시정지의 상태로 남겨졌다.

시댁 어른들은 한숨을 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숨어있는 아이들을 안심시켰고, 시아버지는 대치를 하고 있는 그와 나 사이를 막아섰다. 그리곤 어설픈 중재를 시작했다. 부부라는 게… 산다는 게… 이해하고… 배려… 존중… 한 사람은 져주는 게… 살아보니 이렇더라… 아이들을 생각해서… 좋게… 좋은 게 좋은 거고…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싸우지 마라… 너희만 잘 살면… 바라지 않는다…. 이상적이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말을 늘어놓는 시아버지의 말이 하나도 와닿지 않으면서 나는 묵묵히 그 소리들을 흘려내었다. 이상했다. 구구절절 시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말들을 뱉어내는 것에 화가 났다.  무려 '시'자가 들어간 시댁 어른들 아니던가. 그들은 애초에 내 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서운하고도 분한 감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 편'이 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비난을. 그들이 나를 비난하고 나를 비하한다면 머리끝까지 차오른 억울한 감정을 토로하기라도 할 텐데. 욕지거리를 마음껏 내뱉기라도 할 텐데 ㅡ  격앙된 감정의 소용돌이가 미처 가라앉지 않은 자리에서 듣는 일직선의 말들은 나의 분한 감정들을 꺼뜨리지 못했다. 옳다는 게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자신의 상식과 나의 상식이 맞지 않아 충돌을 했고. 적어도 나와는 생각과 이상이 가깝다고 느꼈던 시아버지의 현 상황에 대한 옳은 소리들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귓가에 닿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무조건 내 말이 맞아요. 내 말이 맞아야만 해요.

억지를 부리고 싶어졌다.


시퍼렇게 물든 마음 위로 어떤 말들이 더해져도 나는 그 말들을 마음 안으로 잠겨 들게 했다. 힘을 갖지 못한 곧은 언어. 정직한 목소리들. 그것들은 나의 내부에 차곡차곡 쌓여만 갔고 나는 더욱 무거워진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은 길어지고 있다.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다만 없던 대화가 더 없어져 이젠 서로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파랗게 물든 인간과 붉은 눈, 그리고 검은 입술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말들에 귀를 기울인다. 가장 조용한 얼굴이 가장 시끄럽다. 내게 주어진 고통을 마주한다.

.

.

.


탓. 사실 탓이 하고 싶었어. 너는 내 탓을 하고. 나는 네 탓을. 차라리 탓했다면 가벼웠을까.


싸운 날. 시부모님이 억지로 데려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 나오는 길, 다 같이 집으로 향하던 그 길에서 걸을 때 보았던 그 뒷모습들이 마음에 남아버렸어. 바람은 좀 불었지만 따뜻했던 봄의 풍경. 그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인 우리들을 보면서. 나는 죄책을 느꼈어. 그건 아주 큰 감정이었어.

탓을 하고 싶은데 아무에게도 물을 죄가 없어. 당신들은 아무 죄가 없어.


내가 가진 불행의 몫을 함께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고통이란 이런 거야. 마음을 끝도 없이 짓누르는거. 끌어안을 거니. 도망칠 거니. 내게 물어왔다. 마음에 있는 검은 입술이 또 멋대로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  05.01. 내부의 말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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